느려도 끝까지
그럴 때 있지 않은가. 관조자가 아니라 경험자의 이너 서클(inner circle)로 나를 유혹하는 이야기를 만날 때. 다시 말해 나도 이런 경험을 하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와 조우할 때. 이를 테면 법정 스님의 글들을 읽었을 땐 나도 고즈넉한 산속에서 계절을 입고 벗는 나무들을 보며 단출하게 살고 싶었고 (하지만 치킨 배달이 어렵겠지 싶어서 포기했다), 웹툰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을 봤을 땐 태권도가 참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이 책, <거북이 수영클럽: 느려도 끝까지>를 읽고 나니 수영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책에 나오는 '접배평자' 중 배영만 가능한 인간이다.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영법만 구사하는 나 같은 인간이, 글에 등장하는 어느 70대 할머니처럼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정직하게 수영하고 성실하게 플립턴을 연습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 나도 백발이 성성한 주름 투성이 몸으로 우아하고 예쁘게 평영 하는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세상의 온갖 번뇌와 스트레스가 버거운 밀도로 나를 눌러 뽀글뽀글 가라앉는 느낌이 들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한 발을 떼고 떠오를 수 있는 힘을 주는 책. 인생의 어느 단계에 있더라도 꼿꼿하게 조금씩 힘을 내어 팔을 내젓고 물을 헤치고 나아갈 용기를 주는 책. 그것도 내 등짝을 때리며 휙 던져 주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는 새 슬그머니 내 주머니 안에 꽂아놓고 팔랑팔랑 헤엄쳐 가는 책.
저자의 직업은 기자다. 매일매일 온 힘을 다해 1분 1초를 다투는 전쟁 같은 레이스를 치르는 워킹맘. 한 번도 악바리 같은 의욕을 놓아본 적이 없고, 단 한 번도 일부러 느리게 가 본 적이 없단다. 그런 그녀가 출산 후 요가마저 너무 열심히 하다가 허리를 삐끗해 디스크 진단을 받고는, 사랑했던 요가와 결별하고 수영을 만난다. 설상가상으로 그 1년 내에 암 판정까지 받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인생을 자꾸 후퇴시키려고 해도 나는 느리지만 앞으로 나간다는 걸 느끼고 싶어서" 그녀는 정확한 진단을 기다리면서도 수영장에 간다.
저자인 수린이(수영+어린이의 합성어로 수영 초보를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어감이 몹시 귀엽지만 어린이가 늘 초보는 아니겠지요.) 회원님에 따르면 수영장이라는 공간은 흉터를 숨기기 어려운 곳, 그렇지만 모두들 당장 숨이 차서 돌아가시겠기에 내 상처에 크게 관심 없는 곳, 상처가 있더라도 그에 대해 편안히 서로 얘기할 수 있는 곳, 지옥 같은 감정들이 마법 같이 녹아내리는 곳, 울어도 눈물이 보이지 않는 곳이다. 또한 내 몸에 지닌 결함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내 몸의 어디가 고장 나 있는지, 튀기는 물의 모습과 방향에 그대로 드러나는 곳.
그리고 그 수영장 안에는 이 치열한 "대 속성과 선행의 시대에, 그 거대한 시대적 흐름을 유유히 거슬러 거북이처럼 수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를 따지지 않고 오늘이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인 것처럼 수영하는 사람들이 있다. 젊은 놈들과 열혈 수영러들이 즐비한 오전 7시 중급반에서 '1번'을 사수하는 60대 할머니, 지역 수영대회에서 6위를 하고서 기쁨 가득한 학생, 백발에 주름이 가득해도 꽃분홍 노란 무늬 수영복을 화사하게 입고 정직하게 플립턴을 연습하는 할머니들, 일주일에 세 번, 스산한 빌딩 숲 속에서 패들을 끼고 언제나 시계추처럼 헤엄치는 부장님, 후회는 없지만 기록은 아쉽다는 수영 선수.
그렇게 나간 수영장에서 저자는 위로를 받고, 느리게 가기와 힘 빼기를 배운다. 속도 대신에, 속도와는 확연히 다른 경쾌함을 얻어가는 것이다. 저자는 첫 강습에서 선생님 말씀에 따라 '아무것도 안 하기'를 해 본다. 기분 좋게 물을 느끼며 천천히 걸어 보고, 물을 이불 삼아 누워 보는.
"우리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레인을 따라 한 바퀴 쭉 걸어갔다 오시구요. 그다음에는 그냥 다 같이 물에 둥둥 떠 볼 거예요."
(중략)
나이도, 성별도 제각기 다른 열댓 명이 연못 표면에 이제 막 착륙한 나뭇잎처럼 초급 레인에서 망중한을 즐겼다. ... 그 첫 시간의 '아무것도 안 함'으로 나는 수영을 계속할 수 있었다.
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올라가면서 저자도, 저자를 들여다보는 독자도,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는다. "속 깊은 동료와 같아서 '척'하는 잔재주를 이내 알아채는" 물, "겸허한 마음으로 걸음마부터 배우려는 사람에게 더 빨리 곁을 내주는" 물. 그 안에서 헤엄치면서, 사는 동안 늘 최선을 다하고 한 번도 힘을 뺀 적 없었던 그녀는 평영 킥을 할 땐 힘을 빼야 앞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힘을 뺄 줄 모르면 그저 제자리에서 버둥대거나 뒤로 가기도 한다는 것. 물과 싸워 이기려 들지 않고 요령 있게 잘 빠져나가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 따뜻한 위로의 공간이었던 수영장은 이렇게 정직한 배움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욕심을 부리며 버둥댈수록 서서히 가라앉아버리는 곳, 매일 하는 백번의 헛손질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곳. 그리하여 저자는 몸에 새겨진 바를 정(正)은 정직하다고 말한다. 어릴 적 피아노 학원에서 선생님을 속이려고 써댔던, 바르지 못했던 바를 정(正)들을 떠올리며.
책 속에서 꾸준히 "회원님!"을 외치는 록쌤의 말들은 득도한 선인이나 경지에 오른 철학자의 말 같기도 하다.
- 아마추어가 킥판 잡고 하는 게 뭐 어때서요. 회원님 인생에서 앞으로 킥판 안 잡고 수영할 날이 더 많아요.
- 단거리 선수처럼 수영해서 어떻게 장거리를 갑니까?
- 근육이 잘못된 동작을 기억하면 안 하느니만 못해요.
- 하다 보면 다 됩니다.
- 몸통을 최대로 돌려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겨우 물에 빠지는 거라면, 그냥 한번 빠져 보는 건 어때요?
내 마음에 가장 콕 박혔던 록쌤의 말은 이거였다. 처음엔 평범하고 밋밋했던 말이 점점 큰 울림으로 내게 와 닿았다.
- 어른들이나 부끄러워하지 애들은 다 이렇게 배워요!
그렇지. 배울 때는 아이처럼 배워야 하는데, 인생이 중급반이라고 모든 걸 중급처럼 대하려는 내가 십이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끔해지는 말이었다.
수영장의 그 직선 레인을 따라 모녀 삼대의 이야기가 세로로 다정하게 걸린다는 점도 흥미롭다. 책에는 엄마의 수영 가방과 딸의 수영 가방이 함께 등장한다. 그 안에 비슷하지만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담고서. 저자는 매일 현관 옆에 놓인 엄마의 수영 가방을 보면서 인생에서 수영의 의미를 생각하고, 몸을 뒤집기 위해 부단하고도 미련한 헛발질을 계속하는 딸을 보면서 수영의 자세를 배운다. 물의 밀도와 워킹맘을 둘러싼 세상의 밀도를 비교하는 부분, 일과 가정 어느 한쪽도 가라앉지 않는 중립 포인트를 요구받는 워킹맘으로서의 애환을 그려낸 부분은 이 시대의 엄마들에게는 수영장 물을 한 입 먹은 듯 매콤하고 묵지근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킥판을 금지당한 프로페셔널들의 세계에서 0.01초로 갈리는 승부의 한 복판에 있다가, 자유로운 물속에서 숨을 쉬거나 몰래 울 수 있는 곳. 나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반복하는 백 번의 헛손질을 통해 물 잡기를 연습하는 부분에서는 좋아하는 철학자 장자의 이야기가 슬그머니 수면에 떠오르기도 했다. 나도 물에 둥둥 뜨면서, 정직하게 느릿느릿 앞으로 나가면서, 장자가 말하던 물의 도를 깨닫고 물의 길을 보게 되는 순간을 경험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왜 수영을 하냐고 묻는다면 '처음부터 배울 수 있어서, ' 그리고 '물이 지탱해 주기 때문에'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나에게 맞는 나만의 영법으로 이 세계라는 수영장 안에서 나의 레인을 지키며 수영해 가는 사람들이다. 아니, 우리는 사실 잔잔한 수영장보다는 더 넓고 거친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 "각자 지닌 삶의 유연성과 근력, 지구력에 맞춰 매일 일상을 헤쳐 나가는 사람들." 그렇게 열심히 세상에 헛손질 헛발질을 하며 바를 정을 새기다 보면, 큰 파도를 만나 가라앉을 때도 있겠지. 하지만 책 속에 등장하는 아이의 말처럼, 물을 잡고 날아오르는 순간도 분명 있을 것 같다.
"우와! 엄마가 새처럼 날아!"
리딩리딩은 이제 사업을 접었고 따라서 사이트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아래의 메모는 지우고 싶지 않아 그냥 남겨둡니다.
리딩리딩이라는 서평 사이트에 북 큐레이터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리딩리딩(READING LEADING)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촉을 세우고 있는 다수의 큐레이터들이, 발간된 지 2년 내의 신간을 소개하는 곳입니다. 해당 도서를 읽을 때 함께 보면 좋을 키워드들을 묶은 '리딩맵'이라는 재미있는 콘텐츠도 함께 제공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거북이 수영 클럽: 느려도 끝까지>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웹툰 <샌프란시스코 화랑관>, 영화 <카모메 식당>,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 펑키타 수영복, 호주의 본다이 비치 등이 키워드로 함께 붙어 있습니다.
* 오피스룩이라고 봐도 좋을 법한 일상의 복장을 하고서 수영하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과 그 시선이 가닿는 곳에 그려진 물속의 수영하는 사람(그것도 책 속의 주인공이 가장 고전하는 평영으로!). 책의 내용을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이게 아닐까 싶을 만큼 잘 어울리는 그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호크니의 그림에 워낙 물이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 물을 그릴 때 정말 정말 느리게 작업했다는 호크니의 말과도 뭔가 묘한 접점이 생기는 것 같았거든요. 리딩맵으로 가장 먼저 떠올린 키워드는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이었고, 그다음으로 둥실둥실 떠오른 키워드.
저는 <Knowledge &human>을 대표 카테고리로 삼고 서평을 연재할 예정이고요. 첫 책으로는 보드랍지만 묵직한 생각거리를 전해주는 <거북이 수영클럽: 느려도 끝까지>를 골랐습니다. 여기서 살짝 쓰는 이야기지만 책의 저자는 제가 브런치에서 구독하면서 처음 알게 된 분이에요. 수린이라는 필명으로 '어쩌다, 수영'을 연재하신 분인데 글 한 편 한 편이 물이 착 감기듯이 마음에 감겨들어 참 좋았습니다. 글이 뜸하셔서 혹시라도 건강이 안 좋아지셨나 걱정하던 차에, 그간의 글이 책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불교 신자인 저는 할렐루야를 외치고 말았지요. (본캐(?)를 숨기는데 능하셔서, 첫 서평을 이 책으로 정하고 책을 주문하려고 작가 소개를 보다가 국내 유명 일간지 기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지 뭐예요. 아무튼 리딩리딩 대표님과 수린이님, 그리고 저 사이에서 뭔가 버뮤다 삼각 찌찌뽕이 일어났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지금이야 의욕이 넘쳐서 매달 연재가 가능할 것 같지만, 제가 좋아하는 '지속 가능한' 사이클을 생각해 봤을 때는 격월로 가는 게 맞을 것 같아서 격월로 연재합니다. 그래야 느긋하게 좋은 책을 골라서 설레며 읽고, 차곡차곡 즐겁게 기록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가방끈 늘이던 시절의 트라우마로, 짧은 기간에 글을 쥐어짜내야 하는 걸 몹시 싫어합니다...)
아직은 이 사회에서 목소리에 에코가 덜 들어간 작가들의 단단하고 따뜻하고 좋은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만 그렇고 견문과 안목이 아직 따르지 못해 걱정입니다. 부지런히 읽고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멤버십과 상관없이 리딩리딩이라는 사이트를 둘러보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아래에 서평 링크를 첨부합니다.
https://www.rglg.co.kr/content/2007122234084zAiK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