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클레와 장 자크 루소
앞 글에서 인간은 어떻게 불평등해지며, 왜 불행해지는지에 대한 루소의 설명을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앞서 등장했던 클레의 작품, 벌거벗고 마주친 두 사람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살펴보자.
자연 그대로의 배경 속에서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두 사람.
억지로 자신을 낮추려고 하고 있다.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왠지 낮춰야만 내가 살 것 같다는 느낌에서 낮추는 중이다.
저 사람이 사회로 돌아가서 자기 신분의 옷을 걸쳐 입으면 그 옷이 왕의 화려한 로브일지, 귀족의 부드러운 비단옷일지, 평민의 거친 작업복일지, 아니면 노예의 허름한 누더기 옷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문명의 세심한 손길을 거친 인간들이지만, 이렇게 비굴하게 수그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얼마나 불행하며 야만적인가.
인간이 만든 사회, 그 안에 조직화된 신분과 계급은 얼마나 인간을 우습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가.
저들이 문명사회 이전의 야만인, 루소가 말하는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이었다면 그냥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서로를 무심히 지나쳐 갔을 것이다.
클레의 작품은 이렇게 루소가 개탄했던 타락한 인간 사회의 모습을 정적인 스냅샷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장면은 정적이지만 저 둘의 마음속은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헤어스타일과 수염으로 보건대 저 둘은 각각 프러시아의 빌헬름 2세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의 유럽 상황에 대한 클레 특유의 위트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황제, 혹은 왕.
인간 사회에서 가장 고귀한 인간으로 칭송받는 자들이 서로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우습고도 슬픈 모습.
루소가 인간 사회를 돌아보며 느꼈던 슬픈 감정이 아마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루소가 야만인 앞에 ‘고귀하다’는 형용사를 부러 붙인 건지도 모르겠다. 루소의 야만인들은 고귀했으나 그림 속의 고귀한 왕들은 야만적이다.
작품에서 눈을 들어 현재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역시 슬프다.
신분제가 사라져 노비 언년이와 최참판댁 주인마님은 없어졌지만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새로운 숟가락 신분제를 자조적으로 구성 중이다.
엄친아라는 신조어가 떠오르던 시절, 이 말이 그토록 각광받았던 이유는 삼천리 방방곡곡의 아들 딸들이 그렇게 무수하게 비교질을 당했기 때문이다. 자매품으로 여자친구 친구의 남자친구(침 튄다), 아내 친구의 남편도 존재한다고 한다. 듣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해맑게 밀려온다.
한편,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허영심의 표출은 새로운 날개를 달았다. 타인과의 간극을 한없이 벌리고 싶어 하는 인간들에게 인터넷은 효과적인 신무기다. 공작새가 꼬리를 펼치듯 이들이 허영심을 동서남북으로 활짝 펼쳐대면, 가지지 못한 자들은 그것을 부러움 섞인 눈으로 바라본다. ‘좋아요’를 누르면서도 때로는 절망하고, ‘부러워요’라는 답글을 달면서 마음속에 미움의 씨앗을 몰래 키워간다. 문제는, 이게 루소가 말한 대로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가면일 수 있다는 점이다. 소셜 미디어에 올라오는 그 모든 반짝이는 행복한 순간들만이 그들의 삶일리가 없다.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어려서부터 부모의 인정을 받겠다는 인정 투쟁을 시작한다.
물론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듬뿍 받으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삐끗거리게 된다.
나만 해도 그렇다.
돌아보면, 철이 들기 전의 나는 엄마 아빠의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 올백에 지나치게 집착했던 어린 예서였다. 답을 맞히는 게 재미있기는 했지만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뭘 배웠는지 보다 몇 개를 틀렸는지가 더 중요했다.
공부를 못하면 못해서 힘들고, 잘하면 잘해서 힘든 세상이었다.
어떤 방법으로라든 성적을 올리고 싶어 하는 마음들은 종종 작은 거짓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학생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이 앞으로 수두룩 빽빽한데 어렸을 때부터 거짓 점수 위에 잘못 올라앉아 버리는 게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앞으로 얼마나 더 큰 거짓을 만들며 괴로워해야 하는지, 처음의 그 작은 거짓을 만들어 낼 때는 미처 모른다. 그렇게 차곡차곡 거짓말을 쌓아가다 보면 나중에는 자신의 인생 전체가 거짓말 위에 올라앉은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그러면 얼마나 삶이 허무해질 것인가. 부정행위라든가 시험지 유출 같은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자면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진다.
어른들의 허영심은 분명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부모들의 허영심이 백지 같은 아이들에게 그대로 투과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느 여름, 나는 휴양지의 모래사장에서 귀여운 여자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작은 아이는 모래로 토닥토닥 집을 지으면서 조그만 입으로 참새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아파트 다오. 아파트 줄게 주상복합 다오.”
어이쿠. 모래가 갑자기 입 안에 들어온 것처럼 깔깔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라는 모 건설사의 광고 문구가 유행한 적이 있다. 그냥 좋은 곳에 살아서 내가 너무 좋다고 하면 누가 뭐라 할까. 그런 곳에 사는 분들이 그냥 거기서 기쁘게 사시면 되는데 주변을 돌아보며 휴거, 월거지, 전거지 같은 이상한 말들을 만들어낸다. 국민 임대 아파트인 ‘휴XXX에 사는 거지’라는 뜻이라니, 그야말로 휴거가 일어날 일이다. 같이 지어진 아파트인데도 임대 동은 화재 시 탈출구가 막혀있다거나, 아이들마저 놀이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따위의 뉴스가 보도될 때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없던 비염이 다 생길 지경이다. 생각해 보자. VIP도 모자라서 VVIP, VVVIP(무슨 빌헬름 36세도 아니고 뭐가 이렇게 베리베리베리 중요하실까)를 만들어내는 사회에서 VVVIP가 보기에는 VIP도 거지다. 허허.
우리 사회에 이토록 혐오의 정서가 짙게 깔린 데에는, 작은 땅덩어리에 모여 살면서 비교하기 좋아하는 습성이 크게 한몫하는 것 같다. 빈부격차는 갈수록 심해지는데, 위는 아래와 끊임없이 격차를 벌리고 싶어 한다. 그 와중에 위는 아래를, 아래는 위를 혐오하고 있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본다.
루소의 말을 빌자면, 우리는 좁은 땅에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비교를 습관화했고, 그 결과 혐오가 가득한 사회로 타락해 버린 것이다. 내가 1등인 사회, 그렇지만 혐오가 가득한 비정한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내 아이가 최상위 계급에서 다른 모든 아이들을 발 밑에 두고 그들과의 격차를 한없이 벌렸으면 하는 그런 부모들이 있다면, 루소를 한 번 떠올려보면 좋겠다. 그런 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 아이를 파괴하는 악순환이 될 뿐이라는 루소의 말을.
공정한 절차, 선의의 경쟁을 통해 맨 앞에 서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니까 남과의 격차를 벌리는 두 가지 방법 중에서 첫 번째 방법, 스스로 운동을 열심히 했고, 달리는 게 즐거워서 연습을 많이 했고, 그래서 친구들보다 잘 달리게 되었다면 그걸 대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물론 여기에서는 '스스로' '즐거워서'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게 아니면 두 번째 방법과 다를 바 없는 것.)
그러나 두 번째 방법으로 은근슬쩍 눈을 돌린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불행해진다. 아이들에게 친구란 늘 비교의 대상이며 틈이 보이면 남들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아이에게 친구가 하나씩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친구 없는 삶 그거 되게 재미없을 텐데.
(사실 밑변 없이 존재하는 피라미드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자꾸 밑을 짓밟으려고 하면 피라미드는 부글대기 마련이다. 차 교수님 그렇게 꼭대기 좋아하시다 뒤집히는 수가 있어요. 루소가 프랑스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거 아시잖아요.)
인간으로 태어나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상, 우리가 비교의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나도 인간인지라 우리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잘 지내는지 궁금하고, 뭘 시키면 잘 따라 하는지 궁금하다. 그림도 좀 잘 그렸으면 좋겠고, 노래도 잘 불렀으면 좋겠다.
사실 우리 아이들은 그림을 엄청 못 그린다.
유치원에 가 보면 현실주의 화풍의 그림들이 즐비한 가운데 우리 아이의 추상미술은 단연 돋보인다.
(다른 아이들의 작품을 여기다 함부로 올릴 수 없어 비교해 보여줄 수는 없지만, 친구들은 옷의 무늬까지 어찌나 사랑스럽게 그렸던지. 우리 아이의 그림에는 머리.. 는 있는 것 같다? 나는 애가 자기를 그냥 촛불에 비유한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민주주의 영재인 걸로.)
사실 좀 걱정된다.
나중에 쓸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독일의 학교 시스템은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평가가 이루어지고 대략적 진로가 결정된다. 그리고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그림은 꽤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일부러라도 그림을 같이 그리고 놀아볼까도 했는데, 아이는 글씨나 숫자 쓰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그림엔 딱히 관심이 없다. 그림을 그려보자고 하니 신나게 1부터 100까지 쓰고 앉아 있다.
(.........이 자식아, 그림을 그리라고오.........)
근데, 걱정해 봐야 나도 불행하고 아이도 불행하다.
어차피 타락할 (음?) 아이들인데, 미리부터 루소의 그 타락한 존재로 만들고 싶지 않다.
아이들에게 다른 것 이것저것 바라지 말고 그거 바랄 시간에 나나 똑바로 살아야지.
하루아침에 아이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될 리도 만무하고, 우리가 모여 사는 환경을 탓할 수도 없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타인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을 가지는 일이다.
(...라고는 생각하지만, 나는 아직 연체동물처럼 물렁물렁하다.)
지금은 아직 꼬마들이라 덜하지만, 아이들이 자라날수록 나의 걱정과 비교는 함께 자라날 것이다.
그때도 내가 지금처럼 아이의 그림이나 성적을 보고 푸하하 웃을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은 없다.
나나 똑바로 살면서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 수밖에.
그래도 끝내 속에서 슬며시 못난 마음이 솟아오를 때는, 어쩌다 만난 이 시가 따뜻한 위로가 될 것이다.
딸을 위한 시
마종하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
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다 말고
관찰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사람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오늘은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가를 살펴서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관찰을 잘하고 다정한 아이.
사실 저렇게만 커준다면 나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어, 그러니까, 지금으로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