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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Oct 08. 2019

아동학대를 바라보는 마음  

맹자와 마루야마 마사오

때리지 마


손님에게 낼 에그 타르트를 바삐 굽고 있는데 첫째가 오븐용 타이머를 리셋시키며 놀고 있었다. 으아, 망했다. 대체 몇 분이나 구웠더라.


“엄마 이거 지금 쓰고 있는 건데 그럼 안 돼!”

급한 마음에 그만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바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아이들의 눈물샘은 어떤 회로를 갖고 있는지 몹시 궁금하다. 어떻게 그렇게 1초 내로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까.) 울먹이며 뱉은 한 마디.


“때리지 마.”

그 한 마디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때리지 말라는 그 조그만 소리를 직접 귀로 들으니 내가 방금 이 아이를 때렸구나 하는 자각이 몇 배로 세게 들었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네가 그러니까 엄마가 당황해서 그랬어.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엄마가 정말 미안해.

그랬더니 금세 울음을 그치고 다른 걸 갖고 논다.

마음이 아프고 너무 부끄러웠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는데, 이렇게 잘 알아듣는 너에게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갔구나.

이게 뭐라고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엄마와 아빠는 내 아이의 눈에 아주 큰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 커다란 사람이 손을 들어 나를 때린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엄마가 되고 난 뒤 자꾸 내 밑바닥을 보게 된다.

그동안 나는 스스로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나는 의외로 신경질과 짜증이 많은 사람이었다.


뭐 신경질과 짜증을 부리며 살 수도 있지. 그게 인간이지.


하지만 그런 지옥의 개드래곤(..... 대체 무슨 동물일까.....)이 내지르는 불꽃이 그걸 받아들일만한 성인들에게 발사되는 게 아니라 뭘 잘 모르는 나보다 작고 약한 아이들, 쉽게 말해 만만한 약자에게 간다는 점은 문제가 아닐까.

전자는 결투가 되겠지만, 후자는 봉변일 뿐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정말 부끄럽다.

아이를 안고 볼을 부비며 사과하지만, 학습효과 없이 며칠 뒤에 또 불을 뿜는 나를 본다.

나 왜 그러냐. 불혹이 넘었는데 공자 할아버지 보기 부끄럽게시리.

내가 수족냉증이 오는 건 불꽃을 하도 뿜어서 그런 게 아닐까, 반성하는 마음으로 생각해 본다.  

상상 속의 동물, 지옥의 개드래곤. 오늘도 왼쪽 뒷발로 쓱쓱 그려보았다.


귀뚜라미와 민달팽이


살면서 완력에 당해 본 일이 몇 번 있다.

다행스러운 건, 거의 모두가 장난처럼 일어난 일이었거나 결국은 상대가 풀어 주었다는 것.

특히 동아리 동문 체육대회 팔씨름 부문 우승에 빛나는 나의 힘을 믿고 남편에게 장난을 걸다가 처참히 당한 경우가 많다. 낄낄거리며 장난을 치다가 그가 어쭈? 하면서 나보다 길고 힘센 팔다리로 내 사지를 결박하면 단박에 나는 쭈그렁 개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시작한 건 나고, 둘 다 웃고 있지만, 꼭 붙잡혀있을 때만큼은 순간적으로 처참한 무력감이 스친다. 인간이 한 인간을 힘으로 대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이 순둥한 사람이 갑자기 외계인의 정신 지배라도 받아 돌변한다면, 나는 어떻게 나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인가.

(* 잠깐. 쭈그렁 개불이라는 것은 혹시 둥근 삼각형, 비단결 같은 사포와 동급의 비유인가? 어감이 마음에 들어 계속 쓰고 싶은데 쭈글쭈글한 개불 보신 분 제보 바람.)


누구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눈빛이 어떤 느낌인지, 어떤 꿈을 지니고 살고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며, 노는 모습은 어떤지 등등.

내가 특히 무게를 두는 기준은 약자에 대한 태도다.  

나는 약한 존재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난다고 믿는다. 내 발 밑을 평화롭게 지나가는 달팽이라든가, 둥지에서 떨어져 힘없이 울고 있는 새끼 새라든가, 새 식구가 된 강아지라든가, 온 힘을 다해 나를 의지하고 있는 조그만 아이 같은.

이성적인 언어도 통하지 않고 나에게 반항할 힘이라고는 우스울 정도인 그런 존재와 조우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고, 그들과 어떻게 만나는가.


동물이나 아이를 대할 때면 그 사람이 보인다.

내 반려견에 대한 사랑이 타인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와 함께 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듯하여 꼭 정비례 관계라 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로는 그렇다고 본다.

그래서 이상형을 질문했을 때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아이와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답변을 나는 그런 의미로 해석하곤 한다. 내 힘과 권위를 과시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린 존재들을 따뜻하게 감싸고 존중하며 사랑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좋아요,라고.   


처음 벌레를 밟아 죽이던 느낌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어렸을 때 살던 집에 차고가 있었는데, 습하고 어두컴컴했던 그곳엔 귀뚜라미가 많았다. 어릴 때의 기억은 왜곡되거나 과장되기 쉬워서 실제로 얼마만큼의 귀뚜라미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린 내 눈에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차고의 불을 켜면 이 제페토의 친구인 지미니 크리켓들이 일시에 서전트 점프를 하며 날뛰는데 실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장관이었다. 소심한 꼬맹이였던 나는 차고 안에 있던 연장을 가져오라는 아빠 심부름이 아니면 차고에는 절대 가지 않았고, 가서는 불을 켜는 동시에 눈을 꼭 감고 백을 센 뒤에야 눈을 떴다. 식구가 많았기에 어차피 차를 탈 때는 대문으로 나와서 주로 아빠가 밖으로 차를 뺀 뒤에 탔다.


하루는 차를 타고 나가시는 아빠를 배웅하려고 엄마랑 집 앞에 나와 있었는데, 웬 미친 귀뚜라미 하나가 정신을 잃고 차고에서 뛰쳐나와 나에게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으아아, 공포 그 자체.

여고괴담의 그 유명한 귀신 다가오는 씬을 나는 그렇게 네댓 살 무렵에 미리 스포일러처럼 보고 말았다.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서 파닥파닥 발을 구르다, 그만 꾹 밟고 말았다.

내 발 밑에서 한 생명이 툭 터져 목숨을 잃던 그 느낌.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생생한 느낌에 눈이 질끈 감긴다.   
 

불심이 깊은 집안에서 자라난 탓도 있겠지만(평소에 터프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큰언니는 누가 요리용으로 선물한 랍스터를 형부와 함께 먼 길을 운전해 바닷가에 놓아주고 오는 종류의 인간이다. 최근엔 너구리와 친해져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모양.), 내가 내 손으로 한 생명을 죽게 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죄책감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나는 그 뒤로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발 밑에 붙어있던 그 느낌에 괴로워했다.

그런 나를 보고 엄마가 가르쳐 주셨다. 잘 모르고 벌레를 죽였을 때나 지나다가 죽어있는 가엾은 동물을 보게 되면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하라고. 다음에는 사람으로 태어나라며 기도해 주라고.
그게 어떤 비밀의 마법 주문이 아니라 그저 화엄경 경전의 이름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엄마가 가르쳐 주신 그 비밀의 주문을 자주 외운다.

대방광불화엄경. 다음엔 꼭 사람으로 태어나렴.

언니네 집에 놀러 온다는 너구리. 최근 언니네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셨다고.

유치원에서 우리 아이들이 귀가할 때 자주 이용하는 작은 샛길이 있다. 풀이 많은 흙길이라 비가 오면 민달팽이 천지다. 그러면 비 온 다음 날 일부러 일찍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던 엄마 생각이 난다. 작은 나뭇가지를 들고 콘크리트 길바닥에 나와 있는 지렁이들을 하나하나 풀숲으로 옮겨 주며 "너 거기 그러고 있으면 죽어."하던 우리 엄마. 세상 만물에 정답게 말을 걸던, 사랑 많은 우리 엄마.


"엄마 이거 봐. 너무 귀여워."
오늘도 보슬비에 토실토실한 민달팽이가 난무하는 귀갓길.
큰 아이는 길바닥에 떨어진 자두를 먹으러 모여든 민달팽이들을 보고 귀엽다고 웃었다.

밞으면 안 돼, 밟으면 안 돼!를 외치며 한 발짝씩 내딛다가 결국은 달팽이가 너무 많아서 집에 갈 수가 없다고 엉엉 우는 둘째를 보고 웃음이 나왔다.

그래, 함부로 밟으면 안 돼.
네 울음이 참 고맙다.

크고 힘센 사람은 그렇게 발 밑을 주의하며 걸어야 하는 법이란다.


아가야 미안해


자고 일어나 뉴스를 보니 또 한 아이가 목숨을 잃었다.

얼마나 더 많은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맞고 있을지 모르겠다.


힘없는 아이들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자세히 읽다 보면 내 영혼이 썩는 느낌이다.

안 봐야지 하면서도 자꾸 마음이 쓰여 기사를 클릭하게 되고, 아까 봐서 대충 아는 내용인데도 볼 때마다 그저 미치겠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기사의 활자들이 한 자 한 자 내 영혼을 고문하는 느낌이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내 손에서 으스러지는 벌레 하나도 그리 마음이 쓰이던데, 저렇게 눈이 반짝이는 사람의 아이를.

(<슬견설(蝨犬說)>의 이규보가 이 문장을 싫어합니다.)

 

아이가 생기니 기존에 대충(응?) 가지고 있던 도덕감과 정의감에 한층 구체적으로 결이 생기고 삶의 순간마다 새롭게 다져지는 걸 느낀다.

엄마가 되고 나니 그렇다.

내 아이가 예쁘다 보니 다른 아이들도 예쁘다.

아이들 뿐 아니라 돋아나는 새싹, 꼬물거리는 강아지, 이 험한 세상에 놓인 모든 작고 귀엽고 연약한 것들이 안쓰럽고 예쁘다.

그래서 아동 학대나, 사고로 생명을 잃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접하면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예전에는 머리로 반응하던 것들이, 이제는 뇌를 거치지 않고 몸이 반응하는 느낌이다.


맹자(孟子)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선한 본성이 있다고 했다.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아이를 보면 누구나 몸을 날려 아이를 구하려 할 것이라 했다. 오늘날로 치자면, 차가 쌩쌩 다니는 도로로 비틀비틀 걸어 들어가는 아기를 보면 누구나 놀라 아기를 막아설 것이란 얘기다.

맹자는 이런 행동이 아이의 부모와 친분을 맺기 위해서도 아니고,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로부터 어린아이를 구했다는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라고 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즉각적인 마음, 공감의 마음이라고 했다. 잘 알려진 측은지심(惻隱之心, <공손추(公孫丑)> 편 )이 바로 이것이다.


惻隱之心 仁之端也. (측은지심 인지단야.)

맹자는 이렇게 다른 사람의 불행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인(仁)의 근본이라 했다.

측은지심은 남의 불행을 나의 불행처럼 느끼는 마음이자, 남의 불행을 무심하게 넘기지 못하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저렇게 아이를 학대하고 방치하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사람들은 측은지심이 없는 사람들일까.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아이를 보면 누구나 몸을 날려 아이를 구하려 할 것이라는 맹자의 말은 틀린 말일까.


맹자와 마루야마 마사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측은지심 인지단야'라고 했을 때 단(端)이라는 글자는 양 끝단, 즉 어떤 일의 처음과 끝을 의미하기도 하고 근본, 실마리나 아주 작은 새싹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단(耑)이라는 글자는 식물이 뿌리나 새싹을 내는 모습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실제 맹자는 도덕성의 성장과 성숙을 식물이 커가는 생장 과정에 자주 비유하곤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씨앗이나 새싹처럼 작은 알맹이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된다. 새싹 같이 작은 가능성의 상태로 주어진 이런 본성에 햇빛과 물을 주어 잘 크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환경이, 교육이, 사회가 중요한 것이다.

인간이 선할 수 있는 근거가 인간 안에 있다며 성선설을 주장하는 맹자가 교육과 환경의 중요성을 일컫는 맹모삼천지교의 주인공이라는 점은 언뜻 모순되어 보이지만, 이 ‘단(端)’이라는 글자의 의미를 알게 되면 논리가 자연스레 이어지게 된다.


현재 우리 사회는 혐오의 가지와 분노의 잎이 너무나 무성하게 자라나 측은지심의 새싹들이 기를 펴지 못하는 사회로 보인다. 혐오와 분노로 가득 찬 사회에서 결국 희생양이 되는 것은 약자들이다. 가장 연약한 어린아이들에게 세상이 잔인해지는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닐까.


일본 현대사상의 거장 마루야마 마사오(丸山 眞男)는 2차 대전 이후 일본 정치의 정신상황을 진단하는 글에서 '억압의 이양에 의한 정신적 균형의 유지’라는 현상을 설명한다. 그의 글을 인용하자면 "위로부터의 억압이 아래쪽을 향해 순차적으로 이양되어 감으로써 전체의 균형이 유지되는 체계"를 말하는데, "자국 내에서는 비루한 인민이며 영내에서는 이등병이지만, 일단 바깥에 나가게 되면 황군으로서의 우월적 지위에 섰던 일본의 말단 사병들이 중국이나 필리핀에서 보였던 포악한 행동거지"가 바로 이런 현상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가족오락관에서 폭탄 옮기기 게임을 하듯 부장은 과장에게, 과장은 대리에게, 대리는 사원에게 차례차례 지랄을 쌈 싸주고, 결국 풀 곳 없는 말단 사원은 지나가던 개를 걷어차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말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메이지 유신 직후에 타올랐던 정한론, 즉 한국을 정벌하자는 주장도 동일한 맥락에서 바라본다. 열강의 중압감이 피부로 느껴지자, 서구 열강들에게 맞았던 뺨을 어루만지던 일본이 동방의 이웃들에게 공격 자세를 취했다는 것이다.


"압박을 이양해야 할 곳을 갖지 못한 대중들이 일단 우월적 지위에 서게 될 때, 자신에게 가해지고 있던 모든 중압으로부터  일거에 해방되려고 하는 폭발적인 충동에 쫓기게 된다."

"앞에서의 치욕은 뒤쪽의 유쾌함에 의하여 보상받기 때문에 불만족을 평균하여... 마치 서쪽 이웃에서 빌린 돈을 동쪽 이웃에게 독촉하는 것과도 같다."         

     - 마루야마 마사오,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중에서


이 '억압의 이양에 의한 정신적 균형의 유지'라는 슬프고도 기괴한 현상을 나는 아동 학대에서 그대로 본다. 지나가던 떠돌이 개처럼 연약하고 힘이 없는 아이들이 그 더러운 감정의 배출구로서 봉변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우리 사회에 날로 부풀어가는 혐오를 누그러뜨리고 분노를 매만져 주는 일이 정말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측은지심이 옅어지고 혐오와 분노가 가득한 사회.

이런 사회의 문제는 그 사회의 일원인 나 자신도 결국은 그 돌고 도는 분노의 희생양이 된다는 점이다.

이 세상에 내 일이 아닌 일은 없다. 불의와 혐오는 방치하면 언젠가 나에게 돌아온다.

부장님으로부터 시작된 폭탄, 그 폭탄의 종착역인 말단 사원이 걷어찬 개는 깽깽거리며 크게 울부짖어 결국은 부장님의 잠을 깨우고 마는 것이다.
개는 울부짖고 물기라도 할 테지만, 연약한 아이들은 그러지도 못한 채 스러져 간다는 점이 더욱 속상하다.


이걸 정치하는 양반들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배철수 아저씨가 한 말이라는데, 나이 40이 넘은 기성세대들은 "세상이 왜 이래?"하고 남들에게 불만을 토로하면 안 된다고 한다. 이 세상을 만드는 데 내가 알게 모르게 일조한 나이이기 때문에.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따뜻한 사회, 내가 살고 싶은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우리는 일말의 책임감을 가지고 작은 일이라도 실천해야 한다.


"나 같은 기성세대는 투덜대면 안 됩니다. 사회가 이렇게 된 데 책임을 지고 젊은이들에게 미안해해야죠."

아저씨 멋져요

게다가 이제 다섯 살, 세 살인 내 아이들의 세상을 만드는 데에는 부모의 지분이 아마도 80 이상일 것이다. 내 말과 행동들이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큰 영향을 줄 것인가 생각하면, 부모들은 끊임없이 나를 되돌아보아야 하는 게 맞다.  


우리 아이가 성인이 됐을 때는 누가 대통령이 되어 어떤 정치를 펼칠까 궁금하다. 그 대통령은 지금 몇 살이나 되었을까 생각하니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진다. 부디 정치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정치를 해 주기 바란다. 그때까지 지금의 엄마와 아빠들이 부단히 노력했기를, 그래서 꾹 누르면 터질 것 같은 이 분노와 혐오들이 그때에는 얌전히 사그라들어 있기를.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아이들은 속상하거나 아플 때 나를 찾는다.

신기한 것은 내가 손바닥을 한 번 살짝 대 주는 것만으로도 다 나은 듯 다시 팔랑팔랑 뛰어간다는 점이다. 내가 아이들의 HP를 채워주는 능력치 만렙의 힐러가 된 느낌이다.

심지어 눈이 따갑다며 콩콩 뛰다가 그 눈을 내 옷에 한 번 쓱 문지르고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뒤돌아 노는 모습에서는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내 옷이 무슨 신소재로 되어 있기에.


아이들은 넘어지는 횟수만큼의 격려와 위로가 필요하다. 제법 잘 걷고 잘 뛸 때까지.

엄마(같은 존재)가 없는 아이들은 그 무수한 횟수를 어디에서 위로받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리다.


사실 나만 힐러가 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의 치유 능력도 못지않게 탁월하다.
그제는 잠들기 전에 속닥거리다가 "이음아, 엄마가 오늘 힘들었어." 한 마디 했더니 아이쿠, 하면서 조그만 팔이 어둠 속에서 뻗어 와 엄마 어깨를 토닥토닥해 주었다.

그렇게, 세 살짜리의 조그맣고 포동포동한 손에 의해 모든 것이 치유되는 기분은 말할 수 없이 따뜻하고 신기하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 서로 날 세우지 않고 토닥거리며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정치도 사회도 우리네 집구석도 삼위일체로 거지 같다고 느껴질 때, 세상이 수학문제집 같아서 개념은 없고 문제만 많다고 느낄 때, 그래도 희망을 발견하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연약한 아이들의 뺨을 때리고 토한 음식을 다시 먹였다는 어린이집 교사의 뉴스가 우리 마음을 한없이 괴롭히지만, 길거리에서 홀딱 벗고 있는 아이에게 점퍼를 입혀 준 한 오토바이 운전사의 뉴스가 또 우리 마음에 따뜻한 불을 켠다.


“선로에서 사람을 밀어버리는 것도 사람인데, 그 떨어진 사람을 구하는 것도 사람인 거예요.”

소설가 정세랑은 말한다. 그녀의 소설 <피프티 피플> 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측은지심의 사회를 만드는 것도 사람, 분노와 혐오의 사회를 만드는 것도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비관적 낙관주의로 세상을 산다.


“당신도 알다시피 인생은 비극입니다. 낙관적 낙관주의는 좀 멍청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관적 비관주의는 좀 신경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관적 낙관주의야말로 세상과 부대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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