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혁명의 시작
19세기. 근대의 마지막 세기이자 현재 정치, 경제 체제인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시작된 시대. 그리고 19세기 역사의 포문을 연 두 사건이 바로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두 사건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자.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잠시 공화국이 탄생 했지만, 나폴레옹이 세운 제국은 최종적으로 패전을 하며 과거 부르봉 왕가의 체제로 돌아간다. 로베스피에르가 혁명 시기에 단두대로 처형한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다시 프랑스 왕이 되었으니 혁명은 분명 실패했다.
하지만 잠시나마 자유를 누렸던 프랑스 국민들은 멈추지 않았다. 부르봉 왕가 복고 이후 왕조 전복을 위한 수차례 시도를 실시한다. 빈체제가 시작되는 1815년 부터 프랑스 초대 대통령이 뽑히는 1848년까지 혁명과 프랑스는 봉기와 혁명의 연속이었다.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에서 일어난 굵직한 혁명은 총 세번 일어났다.
1830.7 (7월 혁명)
부르봉 왕가 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린 혁명. 루이 필리프를 새로운 왕으로 하는 이른바 '7월 왕정' 수립. 이 혁명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자유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작품이 이 혁명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1832.6 (6월 혁명)
빅토르 위고의 작품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된 혁명. 7월 왕정 체제에 불만이 많던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발생됨. 루이 필리프의 진압 실패로 돌아감.
1848.2 (2월 혁명)
7월 왕정에 대항해 일어난 혁명.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왕정이 완전히 무너지고 프랑스 제2공화국 출범. 초대 대통령은 나폴레옹의 조카 샤를 보나파르트. (단, 출생에 관한 의혹은 여전히 존재) 이번 공화국 체제는 4년만에 무너지고 대통령 샤를 보나파르트가 황제에 올라 나폴레옹 3세로 즉위.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된 자유에 대한 열망은 전세계로 퍼졌다. 프랑스의 주변국들은 빈체제를 통해 혁명 정신을 억압하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주변국들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시민혁명을 마주해야 했다. 자유사상은 대서양을 넘어 미국에 있는 흑인 노예들까지도 전달된다. 수천년 동안 이어져오던 신분제를 시민들이 힘을 합쳐 무너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21세기 우리나라와 미국, 프랑스 등 가장 많은 나라의 정치 체제인 현대 공화국의 시발점을 만든 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왕정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자란 국민들이 직접 권력을 가져온 현대적 공화국의 첫 사례였다. 우리나라도 지금의 자유를 얻는 과정이 쉽지 않았던 것처럼 프랑스 역시 험난한 과정을 거쳐 지금의 자유를 얻었다. 어쩌면 프랑스 국민들은 전례가 없던 상황이라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지금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근대 초반 동유럽은 신성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신성로마제국은 해체하고 오스만 제국은 크게 위축된다. 이전에도 설명했듯이 신성로마제국은 여러 가문과 국가가 뭉친 연합체였다.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자 각자 가문들은 서로 독립을 주장하며 동유럽 정세가 대 혼돈에 빠져든다. 제국의 해체로 각자 동맹은 깨지고 각자 살아남아야 하는 시대로 바뀐것이다.
오스만의 식민지 신세였던 그리스, 보스니아, 불가리아가 민족주의 열풍에 힘입어 독립을 주장한다. 과거의 영광은 완전히 잃어버린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오스만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러시아는 그리스와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려 한다. 오스만은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으로 크림 반도에서의 분쟁을 이기며 간신히 국가를 유지해 나간다.
또한 범슬라브 주의와 범게르만 주의가 유행하게 된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로이센은 크게 성장해 독일이 탄생한다. 독일을 통일 시킨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성장을 위해 게르만인들의 협력을 구한다. 그리고 그에 의해 만들어 진 개념이 바로 범게르만주의다. 비스마르크가 범게르만 주의를 활용할 수 있었던 배경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생겨난 민족주의 사상 덕분이었다. 신성로마제국, 라인 동맹 해체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활동해야한다는 내셔널리즘. 그리고 이에 대항하여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거대 국가를 만들려는 범게르만 주의가 출범하면서 유럽의 헤게모니가 재편된다.
특히나 프로이센의 재상 칼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에 의해 수도 베를린을 빼앗긴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보불전쟁을 통해 파리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여 나폴레옹에 대한 복수에 성공한다. 당시 프랑스의 지도자가 나폴레옹의 조카 였던 나폴레옹 3세였다는 점에서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독일은 보불 전쟁이후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며 순식간에 강대국 반열에 오른다. 독일의 팽창을 막기 위해 사이가 좋지 않던 영국, 러시아, 프랑스가 연합을 해 삼국 협상을 체결한다. 독일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역시 사이가 좋지 않던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연합을 해 삼국 동맹을 체결한다. 그리고 이 양대 세력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
국가적 의미에 내셔널리즘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에 대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나라는 폴란드다. 폴란드는 러시아 원정에 참여 대가로 독립 국가를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자발적으로 나폴레옹 군대에 참가한 나라였다.
나폴레옹의 입성 이전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에 의해 분할 통치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바르샤바에 입성해 괴뢰국인 바르샤바 공국을 세웠다. 러시아 원정의 실패로 폴란드인들의 꿈을 물건너 갔지만, 나폴레옹을 좋아할 이유는 확실히 있었다. 당시 폴란드의 지도자 격 인물이자 독립운동가 포니아토프스키는 열렬한 나폴레옹 지지자였다. 폴란드는 나폴레옹 전쟁 패배 이후 다시 러시아와 독일, 오스트리아에 의해 분할 통치를 받는다. 이들은 세계 1차대전이 끝난 이후에나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
폴란드인들의 나폴레옹 사랑은 그들의 국가의 가사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보나파르트가 우리에게 승리의 방법을 보여주었도다.”
나폴레옹 전쟁이 좋은 점만 가져온 것은 아니다. 정치, 사회적 발전을 가져왔을지 모르지만 그에 대한 안좋은 이면도 있다. 당장 나폴레옹 전쟁으로 죽어나간 사람만 수십만명이었다. 나폴레옹은 실제로 프랑스 국민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를 징병했다고한다. 그를 미치광이 전쟁광으로 표현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한 평가다. 그의 시작이 혁명 정신 보호였을지 몰라도, 수차례의 오스트리아 원정과 무리한 이베리아, 러시아 원정은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
나폴레옹에 대한 가장 큰 비판 요소는 바로 아이티다. 북아메리카 카리브해 연안에 위치한 섬나라 아이티는 1791년부터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 투쟁을 시작한다. 아이티의 독립에는 프랑스 혁명이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혁명은 예상 외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노예들을 대부분 해방 시키는 데 성공하여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우기 직전까지 도달했다.
나폴레옹은 소식을 듣고 아이티에 자신의 처남인 샤를 르클레르를 파견한다. 르클레르는 아이티 혁명 지도자인 투생 루베르튀르에게 항복하면 독립국가를 세우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투생은 이 말을 믿고 프랑스와 협상하러 갔지만, 프랑스는 투생을 투옥 시키고 프랑스로 끌고 가버린다. 그리고 르클레르는 아이티 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시작한다.
르클레르는 프랑스에 있는 나폴레옹에게 보내는 보고 문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저항하는 12살 이상의 흑인들은 모두 살해함
아이티 독립 운동군의 포로들을 수장하거나 화형에 처함
원형 경기장에 몰아넣고 사냥개를 풀어 물게함
흑인을 가득 태운 배의 짐칸에 이산화황 가스를 넣어 질식시켜 죽게 만듬
이 중 독가스 살포는 정말 최악의 범죄였다. 당시 추산된 독가스 피해자만 10만명에 달한다. 나폴레옹을 존경했던 히틀러가 홀로코스트에 대한 모티브를 이 사건에서 따왔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더군다나 이후 프랑스 정부는 아이티의 독립에 대한 보상금을 역으로 받아냈다. 프랑스의 논리는 노예 소유주에 대한 합당한 배상이 돌아가야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약소국인 아이티는 강대국 프랑스의 말도 안되는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아이티가 현존하는 최빈국 중 하나가 되는 원인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나폴레옹의 전쟁광적인 면모와 학살은 20세기 수많은 군국주의 지도자들의 모티브가 된다. 아돌프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 이오시프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자국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수많은 학살을 자행한다. 그의 행동이 옳든 아니든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과 식민지 학실이 이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해 준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