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킨과 로션, 옅게나마 비비크림을 바른다.
루즈 핏의 분홍 셔츠, 통청바지, 결혼 전 생일에 친구로부터 선물 받았던 20년도 더 된 황갈색 톤의 목도리, 최근에 구입한 도톰한 재킷, 즐겨 신는 흰색 운동화, 청색의 천가방, 그 속에 노트북과 책 한 권을 넣고 집을 나선다.
거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기분 좋을 정도의 비가 내리는 오늘은 얕은 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물수제비 같은 모양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베이글을 죽죽 찢어 먹고 싶기 때문이다.
며칠 전, 근무 중에 남자 입사 동기 한 명이 문득 생각났다.
'요즘 어느 지점에서 근무하고 있나.'하고 말이다.
2002년에 같이 입사해서 짧은 연수 기간 동안 잘 지냈고, 또 저녁에 몇몇 여자 동기들과 함께 식사할 때면 자기도 끼워 달라며 어느새 같이 밥을 먹으면서 분위기를 주도하던 넉살 좋으면서 가끔은 "엥?"하고 갸우뚱하게 하는 말을 툭툭 던지던 동기다.
제법 거리가 있는 근무지로 서로 발령받았지만 가끔 직무 교육에서 마주치게 되면 점심시간에 같이 밥을 먹는다거나 쉬는 시간에 짧게나마 이런저런 이야기도 주고받았는데 그때마다 "빨리 이 조직을 떠나야겠어요. 나는 안 맞아요."라는 말을 히죽히죽 웃으면서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던 중에도 가끔 그의 이름으로 기안된 전자 문서를 볼 수 있었고 그럴 때마다 '아직 잘 다니고 있나 보네.'하고 실소가 나오기도 했다.
전자 오피스에서 이름을 검색했더니 팝업창이 뜨면서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하고 메시지가 나온다.
잠시 눈을 껌벅거리면서 생각해 보았다. 개명했거나 퇴사했거나 둘 중 하나다. 휴직자도 검색이 되는 마당에.
그와 가까운 지점에서 근무했던 여자 동기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았다.
"모르셨어요? 재작년 연말에 퇴사했어요."
"...... 이직한 거예요? 아직 애들도 초등학생 인걸로 알고 있는데, 어쩌자고 퇴사했대?"
"아이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네. 그 과장님 탄탄한 경제적 자유를 달성했어요. 평생 일 안 해도 될 걸요? 거기다가 명퇴금까지 야무지게 챙겼어요. 툭하면 그만둘 거라는 말을 달고 있었는데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기분 좋게 퇴사했어요. 언니, 우리 먹고살 걱정이나 해야 돼요."
"......"
올해를 포함해서 남편이 지금의 직장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간은 5년 남았다. 5년 중에서도 마지막 한 해는 공로연수 기간이라고 해서 출근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4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이 남은셈이다. 나도 지금의 회사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간은 올해 포함해서 8년이 남았다. 하지만 잠정적으로 남편의 퇴사 시기에 맞추어 퇴사하기로 계획한 상태다. 전문대학을 졸업해서 스물두 살 때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니 조금 앞당겨 그만두어도 괜찮다는 나름 타당한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퇴사 이후에 다른 업을 계획한 것은 아니다.
"그래, 어디 퇴사하고도 그게 타당한 이유라고 생각하는지 그때 가서 봅시다."라고 누군가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소박하나마 남편과 내가 계획한 퇴사 이후의 계획은 각자 공부하고 싶었던 학교로 진학하자는 것이 현재로서는 전부다. 남편은 기술 관련 기능대학으로 나는 아동, 청소년 심리 관련 대학원으로.
5년 뒤 우리 부부가 퇴사하면 남편은 60대에, 나는 50대 중반의 나이로 접어들게 되는데 그렇다면 노후자금은? 양가 어른 세 분은? 아직 대학생인 아들은? 끝도 없는 질문을 나에게 하고 있던 중 동기의 퇴사 소식은 나의 눈을 계속 껌벅거리게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남편과 나는 소비를 귀찮아한다. 질 좋은 식재료 구입에는 주저하지 않지만 그 외 옷, 자동차, 신발, 액세서리, 외식 등에 대한 욕구가 없다. 사람들은 우리 부부를 보고 검소하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게으름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백화점 가기를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하니 말이다. 각자가 좋아하는 운동도 명확해서 남편은 탁구를 나는 걷기를 즐겨하니 그 또한 서로 존중하고 있다. 아들도 우리를 닮아서일까. 전자 기타에 대한 관심과 선호도, 구매는 명확하나 그 외 소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부동산이라고는 살고 있는 34평 아파트가 전부이고, 금융자산을 보면서 '우리 소비 패턴에 이 정도면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아도 되는 노후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져보기도 한다.
오늘처럼 마음이 움직이면 언제든 나설 수 있는 몸과 마음과 시간과 금전적 여유가 있는 그런 중년 노년의 시간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갓 데워서 김이 오르는 베이글을 즐기고, 20년도 더 된 목도리가 아무렇지 않고, 소박하지만 단정한 그런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잘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