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회사 동료들은 내가 우울증 때문에 정신과에 다닌다는 사실을 안다.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혹시라도 잘못됐을 때 그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해주길 바래서다. 내가 그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어제 그 사실을 아는 몇몇 회사 사람들에게 연락이 왔다. 잘 지내냐는 뜬금없는 문자였다. 반가움이 앞섰지만 의아했다. 왜 갑자기? 그제 한 여가수의 사망 보도가 머리를 스쳤다. 평소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던 것으로 알려진 그분의 보도를 보고 내가 생각난 걸까. 그렇든 아니든 내 안부를 물어주는 게 고마웠다.
정신과 치료가 크게 도움이 됐던 나는 가까운 지인들에게 정신과 진료 경험을 이야기하며, 혹시라도 필요하면 가볼 것을 적극 추천한다.
주변에 친한 사람 두 명도 내 적극적인 권유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분명 좋아질 걸 알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정신과 병원의 문턱을 넘은 게 고맙고 기뻤다.
나는 아직도 나 자신과 싸움 중이다. 내 기억력이 이렇게 좋아나 싶을 정도로 사소한 것까지 내 머리를 헤집고 다닌다. 우울증은 내 사고 회로 어딘가 도사리고 있다가 먹잇감이 나타나면 무한대로 몸집을 불려 간다.
하루의 리듬이 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가 가장 힘들다. 생각이라는 걸 하기엔 아직 비몽사몽 한데도 우울은 날카롭게 머릿속을 파고든다. 그러다 오후 다섯 시쯤에는 회복된다. 마음의 건강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지난 우울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앞으로 좋은 날이 분명 올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잠들 때 또다시 생각들이 몰려온다. 마치 저 지평선 너머에서 적의 군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려오는 것처럼 나를 집어삼킬 거대한 생각들이 나를 덮쳐 버릴 것 같다.바짝 긴장을 하고 정신줄을 잡지 않으면 생각에 휩쓸린다. 머리 근육에 긴장을 주고 생각을 한 곳으로 집중해야 한다.
어제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생각이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먼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면서 화장실 한 켠에 틀어놓은 유튜브 영상에 집중했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는 바로 수면유도제를 먹었다. 센게 있고 약한 게 있는데 일단 약한 걸 먹었다.
이런, 잠이 잘 안 왔다.
수면제를 하나 더 먹어야 하나. 확신이 없었다. 부작용이 있을수도 있으니까. 중요한 건 이 사고의 흐름을 늦추면 안 된다는 거다. 당황하고 놔버리면 안 된다. 우울은 그 당황을 비집고 들어온다. 명상 어플을 열고 차분한 목소리에 집중했다. 조금 안정됐지만 아직 잠은 안 온다. 책을 집어 들었다. 요즘 재밌게 읽고 있는 책이다. 책은 위험성이 있긴 하다. 예상치 못하게 내 우울 포인트를 건드릴 수도 있기 때문에. 다행히 잘 지나쳤고 약 기운 때문인지 잠에 빠졌다.
2.
사귀는 사람이 있다. 헤어지고 싶은 마음 반, 이어가고 싶은 마음 반이다. 복잡한 연애 관계의 한가운데 있다. 몇 가지 트러블이 있었고 이걸 계기로 나는 다시 정신과를 다녀야 했다. 이 관계에 대한 생각도 내 하루 리듬에 맞춰 움직인다. 마음 상태가 안 좋을 때는 다 관둬버리고 싶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암흑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다. 인생이 막장으로 치닫도록 놔버리고 싶다. 동시에 두렵다. 보고 싶어 울고불고하다가 한세월을 보내게 될 것 같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그만두는 게 낫다는 결론은 백만 번 내렸다. 하지만 마음이 두려워 쉽사리 꺼내지 못한다. 이렇게 안 좋을 때 하는 결정은 오히려 좋지 않아. 기분이 괜찮아지면 그때 헤어지자고 말하자.
오후쯤 되면 마음이 좀 괜찮아진다. 그러면 헤어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이것도 잘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언젠간 나아지겠지. 생각보다 괜찮을 수 있어. 이제 마음이 거의 말짱해진다는 느낌이 들면 관계를 잘 이어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어려움이 있지만 잘 극복해내고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잠자리에 누우면 그때부터는 다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만두는 게 나아. 그만둬야 돼. 언제까지 이런 고민을 하면서 살 거야. 이 생각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헤어지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헤어지면? 잘 해낼 수 있었는데 내가 다 망쳐버리는 게 아닐까. 어차피 완벽한 관계는 없어. 다 극복하고 이겨나가는 거지. 아니야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야. 나중에 더 큰 일 나기 전에 그만둬야 해. 과거의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면서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를 찾는다. 반복 반복 반복.
객관적인 사실을 주관적인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다 다른 결론이 나온다는 건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하루에 내가 느끼는 감정, 결론들은 모두 내가 내린 결정이라는 것. 하루의 어느 시간대일 수도 있고, 인생의 어느 순간일 수도 있는 부분이다. 다만 다행인 건, 마음이 건강한 때가 있다는 것. 나는 그 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인지 희망인지가 있어서 오늘 내가 우울하더라도 괜찮고 그것도 끝날 때가 있을 거라는 것(사실 이런 생각도 어느정도 회복이 됐을 때나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