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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운 May 17. 2020

기자는 내일 또 기사를 쓰겠지

1일 1발제라니

세상은 발제 있는 세상과 그렇지 않은 세상으로 나뉜다.

1일 1발제. 이 사실을 알았어도 내가 기자가 되려고 했을까. 매일 발제를 해서 기사를 써야 하는 줄은 생각도 못했다. 대부분 기자가 매일 하나 이상 발제를 해야 한다는 걸(아마?)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하긴 기사를 쓰는 게 기자의 일이니 기사를 안 쓰면 뭘 하나 싶기도 하지만)

마감을 겨우 끝내고 손톱만큼 남은 힘을 쥐어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나면 정신줄이 깜빡깜빡거린다. 내가 하루 동안 쓸 수 있는 에너지를 다 썼다(근데 아직 근무시간이 반밖에 안 지났다고?). 의자에 앉아 낙지처럼 고개와 팔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세포들이 에너지를 만들어 낼 때까지 기다린다. 제발 전화 오지 마라, 아무(특히 팀장)에게도 전화 오지 마라. 나를 내버려 둬라. 전화기를 꼭 붙들고 주문을 외운다.

정신이 좀 들면 밥을 먹고 아이템을 찾기 시작한다. 운 좋게 아이템이 내 앞에 떨어지길 또 빌어본다. 오늘자 기사들을 뒤져봐도 나올만한 거리가 없다. 가볼만한 사이트들을 훑어도 내 레이더에는 아무것도 안 걸린다. 현장에라도 가볼까(가볼만한 현장이 있나). 친구들에게 전화해 기삿거리 없냐고 물어볼까. 선배들은 어떻게 그렇게 아이템을 잘 찾는 거야 도대체!

모든 것 속에서 어떤 것을 찾아내야 하는 일. 안 풀릴 때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나만 멈춰있는 느낌이다. 눈과 귀로는 온갖 정보들이 쏟아지지만 손발이 묶여 만질 수도, 걸을 수도 없는 기분이 든다. 이런 기분에 머리 끝까지 담겨 일주일을 보내면 자존감, 자신감 같은 것들은 완전히 다 빠져나간다. 배추를 소금에 담가 놓으면 수분이 쭉 빠져 흐물흐물해지는 것처럼(감정의 삼투현상이라 이름 붙여 본다).

당시 하루 아이템 벌어 하루 먹고살던 나는 팀장한테 싫은 소리 듣지 않는 게 지상 최대 과제였다. 오늘 당장도 급한데 하루 뒤, 이틀 뒤를 볼 여유가 없었다. 하루살이용 아이템을 빨리 찾는 게 관건이었다. 하루살이용 아이템이라는 건, 일반 시민 멘트 몇 개, 관련 전문가 멘트 몇 개, 현장 사진 정도만 들어가도 대략 기사 같은 기사가 나오는 아이템이다. 하루살이용 아이템은 면피용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깊이도 없고 기사로서의 가치도 떨어진다. 일단 내가 먼저 살아야겠기에 기자로서의 사명감이나 뭐 그런 것들은 생존 본능에 압사당한다.

하루 근무시간을 온전히 하나의 기사에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인데, 중간중간 기획기사 주문도 들어온다. 자연스럽게 커피와 욕을 입에 달고 산다.

전쟁 같은 하루를 마친 후에는 절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 물론 대부분의 날들은 정해진 퇴근 시간을 넘겨 퇴근을 했다. 이 고됨이 너무 억울해서 퇴근 후에는 무조건 쉬었다. 기사로만 주 40시간을 외치는 기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기자가 되고 싶기도 했다. 퇴근해 집에 들어오면 그대로 옷을 입은 채 바닥에 누워 단 십 분이라도 잠을 잤다. 선배들은 퇴근 후에는 연락하지 않았다.

편하게 일하고 싶은 사람은 기자하면 안 된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기자도 근로자다. 회사가 주는 월급을 받으며, 출퇴근을 통제당하고, 업무에 대한 지시를 받는다. 전문직도 아니고 프리랜서도 아니다. 회사의 종업원이다.

근무시간 동안 열심히 했다면 당당히 월급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정해진 시간만큼만 일하는 게 편하게 일하는 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근로계약으로 합의된 것 이상을 요구하려면 합당한 보상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그 요구에 동의할지는 기자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기자도 근로자다.

잠깐 흥분했는데, 다시 가라앉히고 글을 마무리 짓자면, 나는 지금 발제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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