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 상담소: 나의 이야기① 나는 그렇게 변호사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은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 준 ‘A’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보려 한다.
| 날카로운 첫 녹음의 기억
그를 만난 건 라디오PD 입사 3년 차쯤이었다. 정기 인사이동이 있었고, 나는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어느 음악 프로그램의 조연출로 발령이 났다. 이 프로그램의 DJ가 바로 ‘A’였다. A와 함께 한 날카로운 첫 녹음의 기억은 대략 이랬다.
오후 *시. 스태프와 게스트가 속속 도착했다. A는 아직. 20분을 더 기다렸지만 A는 오지 않았다. 라디오 녹음은 대부분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진행되기에, 나는 이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불안해하면 스태프와 게스트도 동요한다! 애써 태연한 척 원고를 살피고 큐시트를 점검했다(사실 내가 제일 불안함 ㅎㄷㄷ).
마치 별 일 아니라는 듯 매니저에게 전화를 하고(실장니이이임, 도대체 어디십니까? ㅜㅠ), 머릿속으로는 오늘 해야 할 업무를 최적화하는 시뮬레이션을 마구 돌렸다(필요한 녹음 컷이 4개, 남은 시간은 1시간.. 이제 나의 업무 속도는 마하?급이어야 한다!).
드디어 등장한 A. 30분 이상을 늦었으나 고개를 까딱할 뿐, 태연히 녹음 부스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휴대전화를 꺼내 통화를 시작한다. (네에?? 왜 이러세요?? 당장 녹음에 들어가도 아슬아슬합니다요!! 저 좀 살려주세요! 제발~) 혹시 녹음 시간을 잘못 알고 있나 싶어 토크백을 켜자, 녹음 부스 안 A의 격앙된 휴대폰 통화 소리가 토크백 마이크를 타고 부스 밖으로 넘어온다. “ㅅㅂ ㅅㅂ XY ㄱㄴㄷ 죽어라 살아라…” 욕설이 쏟아진다. (아아아아~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ㅜ) 대기 중인 부스 밖의 신인 게스트들도 긴장한다. 일단 토크백을 끈다.
A의 욕설이 잦아들 무렵, 간신히 녹음을 시작했다. 원래 예정되었던 녹음 시작 시간으로부터 이미 40분이 지났다. 자, 이제 단 한 번의 기술 NG도 용납되지 않는다. 녹음 이후에 바로 생방이 걸려있으므로, 나는 이제부터 초인적 힘을 발휘해야 한다. 녹음실의 엔지니어는 이미 퇴근한 상황. 이제 녹음을 끝내지 못하면 온전히 내 탓이다.
우선 DJ 멘트만 따기(=녹음하기) 시작한다. 생방 끝나고 올라와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채워 넣으면 될 거야. 릴테이프(아직 디지털 편집기가 없던 시절)에 편집점 따위 만들 수 없으니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한다. 여기 들어갈 음악이 3분 22초니까 이 부분 공백을 만들고, 3분 33초부터 다시 멘트 녹음… 자 다시 4분 10초 공백을 만들고, 코너 chord부터 출발… 게스트 코너만 끝내면 어떻게든 될 거야. 집중해! 생방까지 할 일만 생각해. 넌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까 ㅜ)
그날 어떻게 녹음과 생방을 마쳤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아직도 생생한 건 ‘와.. 이번 시즌 나는 죽었다’라는 극도의 절망감. 나는 그렇게 한동안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노련하지 못했던 내 탓이 클 것이다. (그게 더 크겠지) 그러나 23살의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가 온전히 감당하기에 세상은 제법 거칠었고, 날 선 무례함을 태연하게 넘기기엔 내가 많이 어리고 약했다.
| 그렇게 나는 성장했고, 어느 날 변호사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라디오 PD를 10년쯤 하고 나니 내게도 몇 가지 재능이 생겼는데, 가장 큰 능력은 어떤 일이 생겨도 크게 당황하지 않는 담담함. 이 기술은 변호사를 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제법 쓸모 있는 기능이 되었으니, 10년 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많은 사건들 덕분에 나도 많이 배운 셈이다.
그리고 남은 하나의 성과(?)가 더 있다. 그 시즌에 내가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는 것. 거창한 동기는 없었다. 그저 상식과 정의로움이 통하는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나에겐 그게 법학 공부의 이유가 되었다(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ㅎㅎ).
그렇게 우연처럼 나는 법대에 진학했고, 그로부터 10년 후 변호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