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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도 Jul 07. 2021

#017 비에 대한 단상

대학생 땐 비가 정말 싫었다.


우산 없는데 갑작스레 비가 오면 비를 피할만한 곳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하염없이 비가 그치길 기다리곤 했다.

이 사실을 안 후배 녀석 하나는 일기예보에 비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우산을 두개씩 가지고 다녔는데 난 그 아이에게 미안해서 비오는 게 두 배로 싫었다.


일을 하면서도 비가 좋지 않았는데 야외촬영 때 내리는 비는 딱 열배쯤 싫었다.

촬영에 엄청난 지장을 초래할뿐더러 너무너무 추워 오들오들 떨리는 내 몸.


물론 방송결과물만 놓고 보자면, 때때로 의외의 비주얼 덕을 볼 때도 생기지만 

나에게 비는 단지 훼방꾼이요 밉상이었다.


이삼년 전이었나.

빗길을 걷는 건 여전히 싫은데 빗소리는 참 좋다고 생각되었다.


감상용 비는 이토록 예쁘구나, 그동안 몰랐던 사실에 신기해했다.  

창에 균일하게 부딪치는 톡, 톡, 톡, 빗소리가 어찌나 상쾌한지,

차에서 듣는 빗소리는 또 어찌나 매력적인지,

친구에게 드라이브가자 졸라댔던 기억.


오늘 비가 왔다.

바람이 불지 않아 빗방울들이 수직으로 곧게 떨어졌다. 


정직하고 고요했던 비. 


바람과 빗방울의 무게를 이중으로 감당해야 하는 사선비와는 달리, 우산 하나를 둘이 써도 꼭 붙어있으면 옷 젖을 일 없는 신통방통 수직 비.

왜인지 모르겠지만 난 오늘, 

수직으로 내리는 비를 조금 좋아하게 되었다.


참 신기하지.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열배쯤 싫어했던 마음이 조금씩 바뀌어 어느덧 좋아하는 마음도 조금은 생기게 되었으니.


이는 비의 노력이 아닐진대, 

그렇다면 변한 건 나. 그래, 나야.

나에 대해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 대해  

단정 짓는 것에 대한 덧없음을 깨달았던 순간.


여하튼 오늘,

오늘의 봄비는 참 좋았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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