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이름을 짓다
며칠째 중요한 숙제를 못 끝낸 찜찜한 기분으로 작업실을 왔다 갔다 했다. 작업실에 근사한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는데 통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왜 어렵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름 짓기 훈련이 정말 많이 된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메인작가가 되고부터 프로그램 기획안 쓸 일이 많았다. 거짓말 좀 보태서 밥 먹듯이 쓰곤 했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페이퍼로 만들어두려면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게 있었다. 맨 앞장 중앙에 박스까지 그려 넣어 그 안에 당당히 자리 잡아 주고 폰트도 가장 잘 읽히고 두꺼운 것으로 골라 넣어주는 그것!
바로 ‘이름(가제)’이다.
프로그램의 성격과 잘 어울리는 이름을 만들어내는 순간 그 기획안의 흐름에 비로소 숨이 트이기 시작한다. 제목이 흥미로워야 비로소 다음 장과 그다음 장이 읽힐 자격이 주어진다.
내가 아는 외주 제작사의 S피디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즘은 제목이 다예요! 더 괜찮은 제목을 연구해 봅시다!”
방송가에서는 이토록 프로그램 네이밍에 심혈을 기울인다. 왜 아니겠는가, 넘쳐나는 프로그램들 가운데서 살아남으려면 기억이 잘 나야 하고 임팩트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일부러 줄임말까지 생각하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제목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방송작가로서 프로그램 제목 회의도 무수히 많이 했을뿐더러, 라디*스타, 비디*스타 같은 토크쇼를 했을 때도 정말 많은 서브타이틀을 뽑아봤다. 화성*바이러스라는 프로그램을 할 때는 일반인 출연자들의 이름 대신 독특한 닉네임을 붙여주는 회의도 무수히 했다. 흑*요리사에서 흑수저 셰프들이 이름 대신 ‘요리하는 돌*이’, ‘나폴리 맛*아’ 같은 닉네임을 붙여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방송작가’로서만 이름 짓기를 했던 건 아니었다. ‘엄마’로서도 했다. 아이의 태명을 내가 정했다. 험한 세상이지만 모나고 거친 곳 없이 둥글게 자라기를 바라며 태명을 ‘땡글이’로 지었는데 그 덕택인지(?) 정말 전체적으로 땡그란 4.6kg의 우량아를 낳았다.
내친김에 아들 이름도 내가 지었다. 부부가 다 기독교인인지라 사주에 별 관심이 없었고, 작명소보다는 부모의 마음으로 지어주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기에 어떤 이름이 좋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내 커다랗고 둥근 배를 내려다보며 많이 생각한 끝에 최종적으로 결정한 이름은 은우. 성에도 ’ㅇ’ 자가 있었으므로 이름 세 글자에 모두 ’ㅇ’ 자가 들어가는 이름이었다. 둥글둥글 평탄한 인생을 살아가길, ‘은’ 밀하게 ‘우’ 월하게 자라기를 바라며 은, 우. 한자도 ‘온정 있고 뛰어난’ 의미까지 담아서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데 공간에 대한 이름을 정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오프라인 공간인 작업실이 생긴 이 순간, 또다시 나에게 작명의 시간이 돌아왔다. 정체성과 지향하는 바를 담은 이름을 짓고 싶었다.
작업실에 가만히 앉아 이곳의 의미를 되새겨봤다.
어쩌면 단 일 년의 시간밖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공간. 6.9평 작은 공간에 인테리어도 변변찮고 수익화도 전혀 없이 경제적으로는 마이너스지만, 힘들 때 쉬고 싶을 때 언제든 숨어들 수 있는 나만의 공간!
눈을 감으니 마치 고요한 숲에 온 기분이 들었다. 세상과 잠시 차단된 자연 안에 들어온 느낌. 마치 피톤치드가 가득 찬 것처럼 숨이 더 잘 쉬어지는 기분.
그래! ‘고요한 숲’ 이란 의미의 ‘고요림’이라고 짓자!
생각할수록 마음에 쏙 드는 이름이었는데 아직 마음을 놓기엔 일렀다. 똑같은 이름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왠지 양평이나 가평 쪽에 같은 이름의 펜션이 있을 것만 같았다. 서둘러 검색해 봤는데 역시나 있었다. 펜션이 아닌 카페가.
경북 영천시에 위치한 디저트카페 이름이 ‘고요림’이었다. 카페 창밖으로 초록빛 나무들이 가득 들어찬 운치 있는 감성카페였다. 방문자 리뷰를 슬쩍 보니 통창 밖 풍경이 아름답다는 후기들이 많았다. 이름과 매우 잘 어울리는 카페였다. 나보다 먼저 작명하신 영천시 카페 사장님께 미련 없이 양보(?)해드리고 다른 이름을 고민했다.
이것저것 다 빼도 단 하나의 키워드 ‘고요’ 만큼은 꼭 넣고 싶었다. 작업실 공간의 핵심 정체성이었다.
‘고요’라는 단어 앞 또는 뒤에 공간을 나타내는 말을 덧붙이면 어떨까 싶어 이것저것 떠올려봤다. ‘예술가들의 작업실’이라는 의미의 ‘아뜰리에’를 붙여볼까?
아뜰리에 고요.
왠지 문 앞에 이젤을 놓고 앞치마를 두르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
방송 관련 종사자들이 많이 붙이는 단어 ‘스튜디오’는 어떨지?
스튜디오 고요.
흑백 필름을 인화하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웍스’나 ‘라운지’ 등 [공간]을 나타내는 다양한 단어들을 수집하던 중 ‘공간 그 자체’를 일컫는 ‘스페이스’를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노트북의 한글 파일을 서둘러 열고 기획안 1페이지에 제목을 넣듯이 ‘스페이스 고요’를 타이핑해 봤다.
스페이스 고요
SPACE GOYO
스페이스
고요
스페이스 고요
한글로도 써보고 영어로도 써보고. 한 줄로도 써보고 두 줄로도 써보고, 나눔 고딕에서 궁서체로 바꿔서도 써보고 폰트 크기를 확 늘려도 보고 줄여도 보고….
신기하네, 뭘 해도 다 내 마음에 드는 제목이었다. 이제야 이 기획안을 2쪽 3쪽 넘기며 읽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 공간에 꼭 맞는 네이밍이긴 한데 하루만 더 묵혀보자,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걸로 바꾸자, 싶었지만 계획과는 다르게 더는 생각을 안 하는 나를 발견했다. 내 마음속 픽은 이미 ‘스페이스 고요’였던 것이다!
어제의 나보다 좀 더 냉정하고 깐깐해진 오늘의 나 역시 여전히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던 관계로 작업실 최종 이름은 ‘스페이스 고요’로 결정했다. 어려웠지만 뿌듯했던 이름 짓기 과정이었다.
같은 건물에 입주한 다른 사업자분들은 보통 문밖에 상호를 표기한 간판을 붙여뒀던데, 나는 아크릴 레터링을 주문제작해서 작업실 안쪽에 붙여놓았다. 소량의 수제공예품을 파는 ‘아이디어스’라는 플랫폼에 들어가 주문했는데 가격과 퀄리티가 매우 만족스러웠다.
남들이 많이 부를 일도 없는 이름, 나만 알면 될 이름, 그냥 ‘작업실’로만 불려도 전혀 지장 없는 곳이지만 역시 이름이 있으니 훨씬 좋다. 보통명사와 고유명사는 레벨 자체가 다른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