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기형 키보드를 손에 넣다
나도 한때는 스몰 콜렉팅 행위를 즐겼었다. 쓸모가 좀 부족하면 어떤가, 남들 눈엔 쓰레기여도 내 눈엔 보물이면 되지! 작고 귀엽고 예쁜 것들이 없는 세상이라면 너무 푸석거리고 재미없다고 확신하던 시절이 있었다.
허나 젊은 시절의 확신은 볼펜이 아닌 연필로 쓰이나 보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수정되더니 결국 ‘예쁘지만 무용한 것’을 향한 내 애정은 구매의 허들을 넘지 못한 채 방황하다 사그라들곤 했다.
그런 아이템 중 하나가 ‘타자기형 키보드’였다.
그 녀석을 처음 본 건 수년 전 교보문고에서다.
큰 규모의 교보문고에서는 헤드폰, 스피커 등을 비롯해 안마기까지 다양한 소형 전자기기들을 함께 파는데, 그곳에서 이 키보드를 처음 발견한 나는 뭐에 홀린 것처럼 한참이나 자판을 두드려보았더랬다. 타닥타닥! 리드미컬한 소리가 내 손끝에서 울려 퍼졌다. 존재감이 확실한 녀석이었다.
너무 예뻤지만 ‘무용’하다 판단했기에 사지 않았는데, 그 후 인스타그램을 열 때마다 내 피드에 빈번히 등장해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2세대, 3세대로 업그레이드된 신모델이 자꾸 나와 내 마음을 흔들어댔다. 책상 위 물건들에 관심이 많은 편인지라 볼 때마다 눈에 밟혀서 힘들었다.
가격대는 대략 4~8만 원 선. 주위의 누군가가 이 얘길 들었다면 “그냥 하나 사!”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 몇만 원이라 할지언정 나도 양심이란 게 있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을 산다는 건 지구환경에도 안 좋을뿐더러 가족들에게 본이 되지 않는 소비였다.
“단지 멋있으니까, 그냥 갖고 싶으니까 사는 거는 안 되는 거야. 비슷한 게 없어서 꼭 필요하거나, 여러 번 가지고 놀 수 있을 것 같단 확신이 들 때, 그때 사는 거야.”
마트에 갈 때마다 사고 싶은 게 열 개쯤 있는 9살 아들에게 윗 문장을 강한 신념으로 읊어대던 게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다. 이런 내가 키보드를 사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이쯤 되면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지는 분이 계실 거다.
도대체 왜 키보드가 쓸모없다고 하는 거지? 요즘엔 메인 키보드, 휴대용 키보드 등 다양한 용도로 여러 개를 마련해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말이지...
의문을 해소시켜 드리기 위해 설명해 보겠다.
이 키보드의 정체성은 ‘타자기 모양’과 더불어 강력한 ‘소리’다. 타닥타닥! 타자기 치는 소리가 매우 크게 나는데, 이건 사용하는 사람 본인만이 감수할 수 있는 소리지 남이 들으면 분명 소음에 해당된다. 혼자 사는 사람이거나 문 딱 닫으면 소리가 분리되는 나만의 방(공간)이 있는 사람들이 가져야 비로소 쓰임을 시작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결혼 전의 나라면 무조건 샀을 텐데. 지리지리 한 대본 수정에 기분전환을 선사하고, 예쁘게 사진도 찍어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며 약간의 허세놀이까지 해볼 수 있는 물건에 기꺼이 4만 원을 바쳤겠지!
그러나 가족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서는 예쁘다고 쉽게 들일 물건이 아니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무용’했기에 구매욕을 애써 누르며 마음속에 봉인시킨 채 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업실에서 대본 작업하느라 노트북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던 그때, 머릿속에 이미지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아름다운 자태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었던 그 키보드였다.
동시에 이제는 그때의 내가 아니라는 사실도 자각되었다. 이제는 나만의 공간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니까!
효용성 0프로였던 키보드가 순식간에 200프로로 탈바꿈한 이상, 구매를 망설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당장 오늘부터 사용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힌 나는 당근 앱부터 뒤져봤다. 몇 개의 중고가 올라와 있었는데, 내 눈에 제일 예뻐 보이는 화이트 컬러가 2만 원에 등록돼 있었다. 희망거래 위치를 보니 작업실에서 차로 9분 거리.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혹시 오늘 중에 구매 가능할까요? 전 1시간 이내도 가능해서요.”
제발 제발 제발.... 된다고 했으면 좋겠다!
“네 가능합니다!”
예스!
“하자 없고 화이트 컬러인 거죠? 혹시 설명서도 있나요?”
이 와중에 종이 설명서가 더 편한 사람으로서 단골 질문까지 얹어보기.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당근거래는 스마트하게 해야 한다.
“네 하자 없고 화이트 컬러예요. 설명서는 찾아보겠습니다. 근데 홈페이지에 설명이 있어 편해요”
“네 제가 구매할게요! 20분 후도 가능하신가요?”
그렇게 해서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당근 거래.
찾아보겠다던 설명서는 결국 없는 걸로 결론이 났지만 그게 취소요건이 될 순 없었다. 설명서 동봉된 새 상품이 이틀 뒤에 오는 것보다, 몸통만 덩그러니 있어도 이십 분 뒤면 만날 수 있는 당근구매가 지금은 훨씬 더 매력적이었으니까. 물론 정가보다 훨씬 저렴한 것도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판매자는 남자분이셨다. 이 감성 키보드를 직접 사용하셨던 분일까? 암튼, 키보드 본체와 여분 키가 몇 개 들어있는 쇼핑백을 받아 들고 당근페이로 2만 원을 송금했다. 아, 드디어 네가 나에게 왔구나!
작업실에 다시 들어오자마자 상태를 한번 더 체크하고 블루투스 연결을 했다. 안드로이드, 윈도우, IOS 상관없이 총 3대의 기기를 페어링 할 수 있다. 나는 1번 채널에 노트북, 2번에 아이폰, 3번에 아이패드를 연결하기로 했다. 이왕 산 거 내가 가지고 있는 기기들 싹 다 연결하는 거다. 그동안 못 썼던 게 아쉽지 않게 많이 많이 많이 써야지! 순식간에 세팅 완료. 지금 이 글도 타자기 키보드로 치고 있다!
처음엔 좀 어색했다. 자판을 수직으로 누르는 타자기 형식이기 때문에 손가락을 좀 더 과장되게 내리꽂아야 한다. 일반 노트북 타이핑이 스피드스케이팅 느낌이라면, 이 키보드는 피겨스케이팅 쪽에 가깝다. 자판 위에서 점프하며 기교를 부리는 기분이랄까? 일하는 느낌보단 좀 노는 느낌이 든다는 건 장점이고, 타이핑 속도가 조금 떨어진다는 건 단점이었다.
단점을 하나 더 꼽아보자면 돌출형 자판이라 사이사이에 먼지, 과자부스러기 등이 들어간다는 거다. 처음 물건을 받았을 때도 먼지들이 약간 보였었다. 그런데 이거 닦는다고 하나하나 키캡 빼가며 청소할 에너지는 안 날 것이므로, 종종 털어주고 관리해 주는 수밖에. (라고 쓰고 대본 고칠 때 과자를 좀 덜 먹는 수밖에,라고 다짐한다.)
이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좋다. '내가 가져서 뭐 해' ,라고 생각했던 게 ‘이제 가져도 돼’로 바뀌어서. 환경이 바뀌니 ‘필요’가 바뀌었다. 공간이 주는 기쁨.
내가 내는 소리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때로 큰 위안이 된다. 엉엉 울고 싶을 때, 기도하고 싶을 때, 나도 모르게 생리적인 반응이 나와도 부끄럽지 않을 곳.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컥컥컥컥 키보드를 두드려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 없는 곳. 타인의 소리에 민감한 시대에 개인 작업실은 이토록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