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월세가 빠져나간 날
책상과 의자, 소파가 갖춰지고 난 이후부터 한 달 정도는 거의 매일 작업실에 갔다. 외부일정이 없는 날이면 온종일 작업실에 있고 싶어서 일부러 약속도 잡지 않았다.
햇살이 참 좋았던 5월 중순부터 6월 중순까지, 나 홀로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매일 뭘 하고 보냈는지 되뇌어보겠다.
집에서는 하지 못했던 실내운동을 하고 싶어서, 요가매트를 가져다 놓고 스트레칭도 하고 3kg짜리 아령을 구매해 팔뚝 살 빼기 운동을 했다. 땀이 흠뻑 나도 씻을 곳이 없으므로 언제나 운동을 적당히 해야 했는데, 효과는 미미했지만 내 몸을 관리하는 시간을 가진다는 기분만큼은 아주 좋았다.
집에 방치돼 있던 미싱기를 가져와 유튜브를 보며 사용법을 다시 익히고(손 놓은 지 십 년 돼서 다 까먹음 이슈) 자투리 천들로 이것저것 만들어 봤다. 리넨 에코백과 잠옷 바지를 완성한 후 뿌듯한 마음에 소잉 전용 인스타그램 계정까지 새로 만들었다.
영어공부 앱 <스픽>을 열심히 했다. 스터디 카페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공부 중 하나가 바로 영어 스피킹 연습이다. 작업실이 생기면 영어 소리를 입 밖으로 뱉어가며 맘 편히 공부하고 싶었더랬다. 매일 꼬박꼬박 앱에 출석한 덕에 ‘100일 완주 챌린지’에 성공한 회원들에게만 증정하는 사은품 ‘스픽 티셔츠’까지 받았다. (일 년 동안의 일을 되뇌었다면 쓰지 못했을 테지만 초반에 열심히 했던 건 맞기에 당당하게 기록해 봄)
그 밖에 독서, 산책, 작업실 주변 맛집 탐방 등 여러 다양한 것들로 시간을 보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만족감이 컸던 것은 따로 있었으니,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 시리즈>를 정주행 한 것이 그것이다.
“뭐? 그토록 열망하던 작업실에 입주해서 첫 한 달 동안 했던 일 중 제일 좋았던 게 ‘고작’ 넷플릭스 시청이라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왜 나에게 결코 ‘고작’이 아니고 ‘무려!’였는지 설명해 보겠다.
<브리저튼>은 넷플릭스에서 만든 19금 영국드라마다. 19세기 초 영국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으로 소재는 ‘계약 결혼’! (이런 류 참 좋아하는 편) 당시 넷플릭스 역대 시청률 1위를 달렸던 흥행작이다. 2020년 시즌1을 시작으로 2024년 5월, 따끈따끈한 시즌3이 막 나왔던 참이었다.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서 TV 보기가 어디 쉬운가? 아이와 함께 있을 땐 의식적으로 동영상 시청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심지어 청불 영화나 드라마의 경우 아이가 잠든 후에 봐야 속 편한데 그땐 나도 피곤해서 자야 한다. 한정된 시간에 봐야 할 영상들 위주로 챙겨보고 나면 늘 밀리곤 했던 드라마 중 하나가 <브리저튼>이었다. 그런데 나만의 작업실이 생기자 비로소 그 시리즈를 시작해보고 싶은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온 거다! 최적의 장소와 시간이 제공되었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작업실에 TV도 연결했겠다, 넷플릭스 앱에 들어가 냉큼 성인인증을 받은 후 <브리저튼 시즌1> 1회의 시작 버튼을 눌렀다. 재밌다는 후기를 너무 많이 봐서 기대를 한껏 했는데, 어머나! 이렇게나 재밌다고?! 기대 그 이상이었다. 시즌 1, 2, 3, 그리고 외전까지 몇 날 며칠을 도파민과 함께했던 귀한(!) 시간이었다.
이후로도 작업실은 종종 나만의 드라마감상실이 되어주었다. 쿠팡플레이에서 <안나>도 몰아봤고 JTBC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도 봤다. 실컷 보다가 잠시 쉬고 싶으면 마음 편히 멈추고, 다시 플레이하고, 웃고 울었다. 크~ 작업실에서 혼자 보는 드라마가 얼마나 재밌는지 다들 경험해 보셔야 하는데 말이다.
작업실 사용을 꽉 채운 한 달. 월세 낼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5월에 하는 종합소득세 신고를 요 몇 년간 위탁했던 세무회계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다.
“안녕하세요, 매년 그곳에서 소득세 신고해 왔던 방송작가인데요, 제가 이번에 개인 작업실로 사용하려고 소형 오피스를 계약했는데, 혹시 월세 낼 때 주의사항이 있을까요?”
금융에 무지한 편이라 (주관적 평가다) 혹시나 내가 놓치고 있을지 모를 것들을 점검하자는 차원의 질문이었다. 사실 내 문의가 굉장히 전문성이 떨어졌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굉장히 기계적인 (역시 주관적 평가다) 답변이 돌아왔다.
“저희는 그게 무엇이든 간에 경비처리 내용에 들어갈 자료만 있으면 됩니다.”
좀 더 디테일한 설명이 돌아올 것을 예상하며 내용을 받아 적을 준비까지 하고 있었던 나는 약간 맥이 빠졌다. 본디 전문가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빈 부분을 알아채고 부족한 것들을 되물어 가면서 보강하여 상대방의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능력을 탑재하고 있는 분들 아니던가? 이렇게 바로 대화가 종결되는 것은 내 예상에 없었던 터라 당황했지만 이대로 끊을 순 없었다.
자, 침착하자.
나는 다시 몇 가지 내용을 덧붙여 물었다.
“임대인과 관리사무소 모두 저처럼 사업자가 아닌 임차인은 처음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세금계산서를 발행해 주면 되냐고 물으셔서 제가 일단 현금영수증을 받으면 될 것 같다고 했는데요, 맞는 건가요?”
“네 경비처리에 해당하는 자료가 있으면 도움 되는 거니까 현금영수증을 받으시면 됩니다."
결국 메모지와 펜은 크게 할 일이 없었다. 국세청 홈택스에서 전자조회 된다고 하는 것까지 듣고 통화종료. 안개가 걷힌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지만, 특별한 주의사항은 없나 보네,라고 심플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월세를 내는 방법으로 내가 택한 건 정기 자동이체 등록을 하는 거였다.
임대인이 월세 언제 입금되나 크게 신경 쓸 일 없게, 나도 어쩌다 날짜 놓쳐 미안한 마음 가질 필요 없게 그냥 알아서 돈이 빠져나가도록 하기.
주거래 은행인 기업은행 인터넷뱅킹에 접속해서 그동안 내가 신청해 놓은 정기 자동이체 목록들을 살펴봤다.
크게 보면 아파트대출금, 할머니들 용돈, 친구모임 회비 정도다. 나머지 공과금들은 죄다 신용카드이체로 해 두었기 때문에 현금 자동이체 목록은 소박한 편인데, 거기에 작업실 월세가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2024년 6월 14일부터 2025년 5월 14일까지 출금 세팅 완료. 월세 23만 원과 부가세 10%를 합산한 돈이 매달 14일에 빠져나갈 터였다.
이틀 후 6월 14일. 아침 8시 1분에 ‘띠링’ 핸드폰 문자 알람이 울렸다. 기업은행 출금 문자. 액수는 253,000원. 내가 낸 첫 번째 작업실 월세가 방금 내 통장에서 임대인의 통장으로 순환되었다.
드디어 첫 정기지출이 시작된 것이다!
벌써 12분의 1이란 시간이 지났다니 기분이 약간 묘했다. 과연 1년이 지난 2025년 6월 14일에도 난 월세 자동이체를 하고 있을까? 하고 있다면 같은 계좌에 같은 금액을 넣고 있을까? 궁금함과 동시에 잠시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작업실의 첫 번째 월세가 빠져나간 그날, 공교롭게도 내가 몸담았던 프로그램의 종영 회식을 가졌다.
이른 저녁 상암동의 한 돼지고기 식당에 피디, 작가, 출연자들, 카메라팀, 동시팀, 백업팀, 드론팀, 진행팀 등 대략 40여 명이 모였다. 신나게 고기를 구워 먹고 ‘쓸데없는 선물’ 주고받기게임을 하며 웃고 떠들다가 2차로 자리를 옮겼다.
어쩌다 보니 내 옆에 앉게 된 99년생 백업 감독님(허허. 나랑 스무 살 차)이 내 나이를 궁금해하길래 얘기 안 해줬는데, 아뿔싸. 맞은편에 앉은 98년생 막내 피디님이 하필이면 여권 담당이라 스텝들 나이를 다 꿰고 있네? 끝까지 숨길 수가 없어 결국 79년생이라고 알려줬다. 너무 놀라며 30대 중반인 줄 알았다는 낯간지러운 말을 했는데, 어려 보인다고 물색없이 좋아할 나이는 지났으므로 ‘30대 못지않은 에너지로 일하시더라’ 정도로 해석했다.
여럿이서 해외를 함께 누비며 일 년간 방송을 만들어 송출했다. 고마운 분들. 이렇게 북적북적 시끄러운 팀과 함께 일하던 날들을 잠시 뒤로 하고, 잠시 난 혼자 작업실에서 숨 고르기 하고 있겠지.
프로그램이 끝나도 매일 갈 곳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작업실이 없었으면 난 아마 또 스터디카페에 가거나 매일매일 다양한 스케줄을 짜고 있었을 것이다.
역시, 월세가 하나도 아깝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