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소식의 시작
내가 작업에 참여했던 여행예능 시즌 종영 후, 다음 시즌이 한차례 딜레이 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후 드디어 방송일이 잡혔단 소식을 들었다.
방송작가인 나에게 이게 왜 중요하냐면, 방송일이 확실히 잡혀야 사전기획 일정이 나오고, 작가들은 그 시점부터 ‘사전 기획료’라는 이름의 작가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방송이 시작되면 ‘본방송 작가료’를 받게 되며 방송이 종영되면 이후에 재방송 등에 따른 ‘저작권료’를 받는 시스템이다.
아무튼, 공식적으로 새로운 소득 활동을 하게 되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
사전기획을 함께하게 될 후배작가 네 명과 메인피디까지 총 다섯 명을 작업실로 초대했다. 첫 회의 하기 전에 친목을 다지는 자리를 마련해 두면 좋을 듯했다.
날짜, 시간, 주소가 담긴 초대메시지를 보내놓았다. 시간은 목요일 4시 반. 얘기 좀 간단히 나누고 저녁을 먹을 셈이었다. 모두가 참석하겠노라 했다.
호기롭게 초대를 해 놓고 나니 부족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작업실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아온 적이 없었다. 나 포함 총 6명. 두 명이 동시에 찾아왔던 적은 있었어도 그 이상은 없었는데 2인 소파나 다름없는 3인 소파 1개와 의자 두 개가 전부인 곳이었기에 앉을자리 마련이 시급했다. 여차하다간 스탠딩 토크 하다가 밥 먹으러 나갈 형국이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지체 없이 이케아로 직행했다. 평소에 사용하지 않을 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손님들이 찾아왔을 때 휘리릭 세팅할 수 있는 가벼운 의자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발견해야만 했다!
의자 코너로 직행해서 다양한 의자들을 살펴봐다. 적층이 되는 등받이 의자는 덩치도 크고 예쁘지가 않아서 스툴 쪽으로 방향을 좁혔다. 이케아의 대표적 스툴은 두 가지였는데 원목인 ‘쉬레’와 철제인 ‘마리우스’다. 둘 다 쌓기도 가능하고 보관도 쉬워 보였다.
원목 스툴은 블루 컬러가 특히 예뻐 보였다. 곡선의 삼각형 엉덩이 받침 아래로 세 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아래로 내려올수록 살짝 좁아지는 게 디자인적으로 아름다웠다. 화분을 올려놓거나 전등을 올리면 너무 아름다울 것 같았고 침대 옆에 협탁처럼 그대로 둬도 예쁠 오브제 감성이 낭낭했다.
철제 스툴은 네 개의 철제다리 위에 동그란 플라스틱 좌판이 올라가 있었다. 엉덩이 좌판에는 직경 3cm 정도의 구멍 여덟 개가 나 있었는데 블랙 컬러의 스툴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이것은 마치 연탄 같기도 하고 볼링공 같기도 했다. 그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서 들면 아주 편하고 가벼웠다.
아, 잠깐만.... 급하게 사러 온 사람치고는 너무 많은 분석과 감상이잖아? 다시 정신 차리자, 일단 빨리 앉아보렴! 스스로에게 주의를 주며 엉덩이를 대고 앉아보았다.
스툴 치고 둘 다 착석감은 괜찮았다. 그런데 앉은 채로 몸의 무게중심을 이리저리 바꿔보니 삼발이 원목 스툴은 확실히 안정감이 떨어졌다.
대부분의 작가, 피디들은 웃음 한 번 터지면 온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손뼉 치고 옆 사람 밀치며 때리고 박장대소하는 종족들이다. 등받이가 머리끝까지 있는 다리 다섯 개 달린 사무실용 의자를 앉고서도 가끔 한두 명씩 회의 때 요란하게 웃다가 뒤로 넘어가 머쓱하게 바닥에 쓰러져있는 의자를 다시 일으키며 앉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런 종류의 인간들을 초대해 놓고 이 삼발이 스툴을 내어주면 안 될 일이었다.
결국 안정감이 더 높은 다리 네 개짜리 철제 스툴로 결정했다. 개당 7000원이었다. 네 개를 사서 작업실로 돌아와 조립했다. 마침 작업실에 전동드라이버가 있어서 빠르게 조립할 수 있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벽을 꾸몄다. 전 시즌 작가들 중에서 스테이 한 작가가 나 포함 셋. 나머지 후배작가들은 새로 합류하는 상황이었는데 환영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서 나오기 전에 A4용지에 글자들을 뽑아서 작업실로 가져왔다.
연예인들의 SNS를 보면 예능 프로그램 출연자대기실 벽에 A4용지에 큰 글씨로 써져 있는 메시지 인증샷들이 종종 올라오곤 한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재밌게 촬영해 달라는 의미로 제작진들이 재밌는 문구를 만들어 벽에 붙여두는 건데 주로 막내 작가들이 하는 편이다. 종이를 벽에 붙일 때 좌우 균형정도를 봐주던 내가 이번엔 직접 문구 뽑고 타이핑 치고 출력하고 벽에 붙이고 균형까지 봤다. 한글폰트 500으로 놓고 글자 써 본건 아마도 처음이지 싶다.
벽에 붙인 문구는 담백했다. [축 컴백 위대*가이드! 000만 믿을게!] 000엔 피디의 이름을 넣었는데 이번 시즌 새로 메인 피디를 맡게 된 W피디에게 축하와 응원을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벽 꾸미기를 마친 후 다음으로 한 일은 먹거리 준비였다. 근처 디저트가게에서 마카롱과 빵을 좀 사 왔다.
입석 토크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곳이었는데 그럭저럭 앉아서 커피 한 잔 하면서 대화정도 할 수 있는 장소로 변해 있었다.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해! 5명 단체 손님도 수용 가능한 완벽한 공간으로 업그레이드된 순간이었다.
모임 시간 20분 전 커피 5잔을 사가지고 오니 문 앞에 첫 번째 손님이 와 있었다. 역시나 가장 연차가 낮은 후배작가였다. 그 이후 속속들이 도착한 손님들.
그런데 모두가 도착하기도 전에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내 작업실은 전혀 완벽하지 않았다!
일단, 소파에 가방이 하나둘 쌓였다. 그 옆엔 겉옷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1인 1 가방과 1 외투가 모조리 소파 위에 안착한 것이다. 소파는 순식간에 제 기능을 잃고 어느덧 형체도 사라져 있었다.
11월의 손님들은 외투를 입고 오는 게 당연했다. 내 옷이 걸려있던 폭 40cm짜리 행거에는 여유 옷걸이가 1개뿐이었다. 내 옷걸이는 일인용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산 의자가 스툴이 아니라 등받이가 있는 의자였다면 사정은 좀 달랐을 것이다. 각자의 의자에 옷도 걸치고 엉덩이 뒤쪽에 가방도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툴은 오롯이 엉덩이만을 허용하는 물건이었다.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진리를 이렇게 깨닫게 되다니!
고맙게도 빈손으로 오지 않고 저마다 하나씩 선물을 들고 왔다. 크리스마스 느낌 물씬 나는 화분, 아티제 딸기 롤케이크, 디자인 티슈 세트, 구움 과자 세트 등... 그것들이 들어있는 쇼핑백들이 이번엔 모조리 내 책상 위에 안착했다. 올려둘 데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리라. ㅎㅎㅎㅎ
내 작업실에 물건 올려둘 데가 얼마나 없는지 뼈저리게 느꼈던 순간이었다.
제일 마지막에 온 피디는 들어오자마자 벽에 붙은 문구를 보고 웃음을 빵 터트렸고 우리는 환호했다. <스페이스 고요>가 처음으로 전혀 '고요하지 않던' 날이었다. 늘 나 혼자 고요했는데 이런 시끌시끌 바이브도 오랜만에 나쁘지 않더라.
아, 다행히(?) 피디는 가방도 없었고 외투도 벗지 않았다. 뭐든 하나만 더 올린다면 소파 위 옷 무덤이 젠가처럼 와르르 무너질 수 있겠다는 걸 눈치챘을 수도?!
티타임을 하다가 미리 예약해 둔 도보 2분 거리 이자카야에 갔다. 이것저것 요리를 시켜 먹으며 새로운 시즌에 대한 부담 없는 수다를 떨었다. 힘드네 어쩌네 해도 방송 얘기할 때 제일 신나는 종족들과 먹고 마시니 내 안의 열정이 다시 타올랐다. 빨리 촬영 가고 싶네, 막 이런 기분! 이제 곧 본격적으로 출근하면 작업실에 머물 시간이 훨씬 적어질 텐데 그땐 또 어떤 작업실 라이프가 펼쳐질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