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만에 작업실에 갔다
한 달 동안 작업실에 가지 못했다.
일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다. 해외촬영을 두 번이나 다녀왔고, 틈틈이 가족 행사들도 소화했다.
이번 주 역시 바쁜 나날들이었지만 오늘이 특히 바빴다. 아이의 학교 참관수업과 학부모총회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마스카라까지 추가된 화장을 하고 아이와 함께 수업을 받았다. 하필이면 음악 수업시간이었다. 강당에서 자진모리장단에 맞추어 강강술래와 꼬리잡기 놀이를 해서 체력적으로 에너지를 많이 쏟았다. 이후 아이 담임선생님이 정성껏 만드신 PPT를 스무 장쯤 보는 데 집중하느라고 기운이 쪽 빠졌다.
학부모 참관수업을 마치니 3시 반이었다. 회의가 없었으므로 커피 한잔 테이크아웃해서 그리운 작업실로 향했다.
아, 얼마나 오고 싶었던 곳인가. 그동안 나 없이도 잘 있었겠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서 내렸다.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익숙한 복도의 분위기와 온도. 얼른 들어가서 작업실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 봐야지. 한창 난리가 난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를 아르헨티나 촬영가는 비행기 안에서 4편까지만 보았다. 이후에 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그것부터 이어 보고 싶었다.
가까이 가보니 확연히 달라진 게 있었다. 내 작업실 바로 옆 사무실이 그새 바뀐 게 아닌가.
원래 골프 개인교습 하시는 분이 쓰시던 사무실이었는데, 간판이 바뀌어 있었다. 투명 유리문에 레이스 커튼이 쳐져 있는걸 보아하니 여자 사장님이 오신 것 같았다. 아크릴 간판에 영어 상호명이 있긴 했는데 이름만으로는 어떤 업종인지 추측이 잘 되지 않아서 호기심을 자극했다.
재빨리 인스타그램 검색을 해봤다. 후보가 다섯 개 정도 되었는데 가장 맨 위에 올라와 있는 계정을 눌러보고 화들짝 놀랐다. 거의 헐벗은 남녀의 사진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바디프로필을 전문으로 찍는 스튜디오였다. 설마 여기가 이곳? 다행(?)히도 그곳의 소재지는 인천이었다.
두 번째, 세 번째도 상관없는 계정이었고 네 번째 계정을 눌러보니 대문 사진에 업로드되어 있는 로고가 옆 사무실의 로고와 같았다. 게시물 0, 팔로워 0, 필로잉 0. 아마 이제 막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시려는 분이 오신 것 같다.
대문 사진 아래 설명란에는 #테마놀이 #스토리텔링놀이 라는 태그가 붙어있었다. 아이 대상 놀이 프로그램일 것 같다는 추측을 내 맘대로 살짝 해봤다. 다음에 오다가다 문이 열리고 사무실 안의 분위기를 보게 되면 확실히 알 수 있을 터였다. 기회가 되면 인사도 할 수 있을테고.
옆집의 정체(?)까지 파악했으니 이제 얼른 작업실로 들어가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비밀번호를 눌렀는데 세상에 이럴 수가! 비번을 잘못 누른 거다. 잠시 멍해져 있다가 다른 번호를 눌렀는데 이것도 비번이 아니다! 어라? 비번이 뭐였지? 급 자괴감이 몰려왔다. 한 달 동안 오지 않았다고 그 새 비밀번호를 까먹는다고?
충격받은 나는 곧 남편한테 톡을 보냈다.
‘작업실 비번 뭐지?’
‘ㅋㅋㅋㅋㅋㅋ’
곧이어 네 자리 숫자가 돌아왔다.
하아....... 네 자리 비번을 눌러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여섯 자리를 계속 누르고 있었다. 집 비밀번호가 여섯 자리였기에 무의식적으로 눌러댔나 보다. (역시 뭐든지 한 번 시작하면 자주 해야한다. SNS도 주식도 오랜만에 하면 꼭 비번이 생각 안나더라.)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창문을 열면 오돌오돌 떨리던 겨울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봄의 냄새가 창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켰다. 갑자기 들려오는 애니메이션 더빙 목소리. 헬로카봇과 그 주인공 차탄이 출동 준비를 요란하게 하고 있었다. 순간 웃음이 픽 났다. 내가 작업실에 못 오는 동안 남편과 아들이 종종 다녀갔구나! 아들이 주말에 아빠와 함께 작업실에 와서 간단한 연산문제집을 푼 후 애니메이션 채널들을 두루두루 보며 놀다 갔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뭐 또 다른 흔적들이 없나 작업실 곳곳을 둘러보았다. 나는 잘 먹지 않는 캔콜라와 컵라면이 쟁여져 있고 내가 사두었던 커피는 거의 빈 통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생긴 흔적을 목격하는 느낌이 제법 새로웠다. 내가 오지 않던 동안에도 이 작업실은 나름의 활용이 되고 있었다는 게 다행이다.
오랜만에 헬로카봇 주제가를 따라 부르며 이번 달 관리비 146,850원을 이체했다. 한 달 동안 오지 못했지만 아깝다고 생각되지 않아서 신기했다.
열어 놓은 창문에서 들어오는 봄바람이 좋아서 잠시 주변 산책을 하는 거로 계획을 변경했다. 아무래도 <폭삭 속았수다> 는 다음에 보는 게 나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