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마일리지 아워] - 최유나 작가
유연하게 살고 싶어서 루틴에 집착하지 않고 살아왔다. 일이 늦게 끝나면 늦게 잘 수도 있는거지, 라는 마인드였기 때문에 아침형 인간이나 저녁형 인간 따위가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자연스레 매사에 많은 것들이 다소 즉흥적이었고 꾸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좀 달라졌다. 이 나이가 되도록 딱히 내세울 만한 일상의 루틴이 없다는 점 때문에 종종 불안함에 휩싸이곤 했다. 건강과 행복. 오래 지켜가고 싶은 이 두 가지가 ‘좋은 루틴’ 없이도 유지될 수 있는 건가? 아닐 것만 같다는 예감이 자꾸 들었다. 이제라도 나에게 잘 맞는 루틴을 만들어가는 데 도움을 받고 싶어서 [마일리지 아워]를 읽었다.
이전에도 시간관리에 관한 자기계발서들을 많이 읽어봤지만, 이 책에 기대감을 가졌던 이유는 명확하다. 아이 둘 엄마이자, 일하는 변호사이자, 최근 드라마<굿파트너> 집필까지 한 작가가 이 책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내 처지와 비슷한 작가의 글, 살림을 병행하는 워킹맘의 이야기를 더 신뢰한다. 오피스 워커홀릭남들, 미혼인 저자들의 자기계발서는 감동이 있다한들 적용이 어렵기 때문에.
역시나 공감이 많이 되었다. 시간관리의 뼈대를 세우는데 확실히 도움 됐다. 기억하고 싶은 내용들은 필사해두었다. 종종 꺼내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시간관리에 관한 책이지만 다른 측면에서의 통찰도 함께 줬다는 점에서 뜻밖의 소득도 있었다.
평소 미니멀 라이프를 늘 동경해 왔다. 일상이 빡빡하고 번잡하다 보니, 눈에 보이는 환경만이라도 잘 정돈시켜 내적 평온함의 수치를 끌어올리고 싶었다. 바쁜 와중에 매일같이 정리정돈을 잘 할 자신은 없었으므로, 차라리 소유한 물건의 가짓수를 줄이고 공간의 여백을 늘리는 ‘미니멀 라이프’가 대안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집 물건들 중에서는 버릴만한 것들이 보이지 않는 거다. 심지어 날마다 필요한 게 더 생기는 아이러니. 매일같이 무언가를 사고 있었다. 특별히 물욕이 많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왜 자꾸 무언가를 사고 있을까. 결국 남들보다 덜 현명하고 덜 야무져서일까.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스스로에 대한 약간의 질책과 아쉬움으로 덮어두었던 로망이 미니멀라이프였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의 소비패턴을 읽고 미니멀라이프가 나와는 꽤 안 어울리는, 부자연스러운 로망일수도 있겠단 깨달음이 왔다.
저자는 두 아이의 엄마로, 법무법인 대표 변호사로, [굿 파트너] 드라마 작가로, 웹툰작가로, 유튜버로 살기 위해 여러 물건들을 사는데 지체함이 없다. 반품할지언정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당장 주문한다고. 매번 주문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두부나 계란은 정기배송을 시키고, 자동화에 집착(?)하여 쓰레기봉투를 자동으로 묶어주고 갈아주는 휴지통을 구매하기에 이른다.
정기배송의 경우, 때때로 남을까봐 부족할까봐 시도하지 않았던 분야인데 저자는 이미 정기배송 초고수였다. 두부가 남으면 많이 먹어 처리하면 되고, 계란이 부족하면 다음 배송이 오기 전까지 참으면 그뿐이라는 저자의 마인드는, ‘모든 물건들을 필요한 만큼만 사고 싸다고 쟁여두지 않는다’ 라는 미니멀라이프의 기본수칙과 정 반대지점에 있다.
살림하는 사람들은 다 공감할 것이다. 집에 쓰레기통이 서너 개. 한 번에 치울 때 쓰레기가 찬 봉투를 꺼내어 묶고 그것들을 다시 종량제 봉투에 눌러 담고, 빈 통에 다시 새 봉투를 세팅해 뚜껑까지 끼워야 마무리되는 그 과정이 얼마나 지겹고 번거로운지를. 그래도 그것이 최소한의 살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저자는 그 생각을 깨부수고 거금(?)을 들여 소비하였다. 뚜껑이 자동으로 열리는 쓰레기통만 알았지, 봉투 자동리필 쓰레기통은 듣도보도 못했었는데, 검색해보니 이미 수년 전 출시 된 아이템이었다.
시간관리의 한 방법으로 살림의 자동화 비법을 꼽으며 자신의 소비패턴을 밝힌 글을 읽고 생각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이 미니멀 라이프를 꿈꾼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지도 모른다고. ‘바쁜 인간형’인 사람이 살림의 정갈함까지 추구하는 건 지나친 욕심일 수 있겠단 생각.
결국 ‘미니멀 라이프’는 슬로우 라이프를 사는 사람들과의 연결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는 자체결론에 이르렀다. 에너지를 쏟을 곳들이 너무 많은 나에게 지금 필요한 건 물건의 미니멀 라이프가 아니라 시간의 단순화. 나름의 큰 깨달음이었다.
미니멀 라이프를 막연히 동경해왔지만 나랑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이런 싹은 잘라버리는 게 에너지 효율면에서 바람직하므로 미련 없이 로망을 접는다. 언젠가, 내 삶이 지금보다 훨씬 단출해졌을 때 다시 도전해 보고 싶다.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