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예전, 사회 초년생 때 동료와 택시를 잡았던 적이 있다. 동료가 목적지를 말하는데 기사가 조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동료는 화가 났고 아저씨와 싸움이 나려고 했다. 나는 동료를 데리고 내렸다.
동료는 한 동안 계속 화가 나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싹수없게 말하냐고, 왜 자기를 데리고 내린 거냐고,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고 내려서 분하다고 했다. 내가 다른 택시 타면 되지,라고 하자 나보고 대단하다고 했다. 그리고 좀 바보 아니냐고도 했다.
대단한 것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었다. 원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사회에서 나를 알게 된 사람들은 내가 불만이 많고 화를 잘 내던, 그리고 잘 싸우던 어린이 었다는 걸 잘 믿지 못할 거다.
어릴 때는 정말 많은 것들이 나를 화나게 했다. 새로 산 하얀 타이즈가 다리를 조이는 것 같아서 화를 냈다.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내 팔을 잡을 때 긴 손톱으로 긁힌 것도 화가 났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것이 분명한(본인이 나이차이 많이 나는 가족이 만들어줬다고 했다) 만들기 숙제로 상을 받는 아이를 보면서도 화가 났다. 떠들지 않았는데 불러내서 혼나는 것도 분했다. 학교 건물 가운데로 난 계단을 선생님들만 지나다니게 하는 것도 화가 났고, 내 행동을 오해하고 내가 그것이 오해라고 해명했음에도 다른 많은 아이들 앞에서 모욕을 주는 행동에 대해서도 화가 났다. 기본적으로 나는 화가 많았다.
“싸우기도 귀찮아”
어릴 때 어른들이 가끔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남들보다 조금 일찍 깨달았던 것 같다. 정말로 싸우려고 들면 너무 많은 에너지를 하루에도 몇 번씩 쏟아내야 한다. 그래서 가급적 싸우지 않고 부딪히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에너지를 아껴야 진짜로 화를 내야 할 때 쓸 수 있으니까. 나는 화가 많은 것에 비해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은 아니다.
연필이가 유일하게 먹는 과자(그 동네에서 똑같은 상표를 살 수 없을까 봐 일부러 우리가 사서 간 것)를 가져다가 굳이 다른 손주에게 주는 할머니, 우리 가족에게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이라든지, 장애인 가족이 있는 것이 무슨 약점 하나 잡은 듯 눈을 반짝이며 나를 깎아내리는 사람들 같은 일들은 꼭 싸워야 하는 일들이었다.
그 밖에 나와 직접 얽힌 일은 아니어도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의사표현 같은 것들도 에너지가 드는 일들이었다.
만약 연필이가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내가 화 날 일이 좀 줄었으려나. 그러면 작은 일에도 열정적으로 싸우는 그런 사람이었으려나. 아니다. 연필이 탓을 하는 것 같아 그런 생각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