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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레 Sep 27. 2023

미자의 날들

어떤 이에게는 할 수 있는 것이 직업이 된다. 선택이 아닌 목숨처럼. 스물여섯 살의 미자는 생각했다. 돈을 벌지 않으면 내 가족은 죽는다고. 양팔을 크게 벌려 잡고 누군가 도와줘야 머리에 올릴 수 있던 고무 대야는 그녀의 작은 상점이 되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시장에 나가 쪽파, 시금치, 미나리 같은 야채를 사서 다듬어 팔았다. 손이 빠르고 웃음이 예쁜 젊은 여자는 시장 한 구석에서도 빛이 났다. 누군가 그녀에게 꿈을 물었고, “포장마차라도 내 자리가 하나 있으면 좋겠어요.”라는 마음을 알아주었다.



해무가 깔린 듯 뿌연 어둠이 내려앉은 시절이었다. 학생들은 깨진 마음을 안고 소주병을 던지다 지친 밤이면 그 거리로 모여들었다. 골목에 들어설 때 풍겨오는 오방떡 냄새는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포근했다. 손이 큰 목포 사람 미자는 재료를 아끼는 법이 없었다. 계란을 많이 넣은 노란빛의 반죽이 포실 포실하게 입 안에서 녹았다. 유난히 지쳐 보이는 사람에게는 몰래 하나를 더 넣어줬다. 최루 가스로 쓰러져 있는 그녀를 업고 약국으로 피신시켰던 것은 단골손님들이었다. 미자는 사람들이 좋아서 그 거리의 밤을 노랗게 익혔다.



언덕에 자리한 작은 가게에는 계단 위로 조촐한 다락방이 있었다. 둘이 누우면 어깨가 닿는 화장실만 한 크기의 방이 하나, 머리가 닿기는 하지만 책상과 싱글 침대 하나를 둘 수 있는 가게만 한 방 하나. 자식 사랑이 남 다른 미자는 아이들을 떼어놓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는 그 집을 좋아했다. 푸짐하게 내놓는 고향의 백반은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새벽에 일어나 근처 공사장 인부들에게 따뜻한 콩나물국을, 지쳐 돌아온 직장인에게는 야채 가득한 계란말이를 올려주었다.



살고 싶어 하게 된 그 일이 누군가를 살리는 날이 되었다고 믿었다. 미자 씨의 몸에서는 항상 음식 냄새가 났다. 어느 날은 달콤했고, 찬 바람이 불면 매콤한 땀 냄새가 났다. 몸이 아파 가게를 열지 못한 날에는 단골손님들이 굶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매일 찾아오던 할머니 손님이 보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수소문을 한다. 그녀의 요리에는 깊은 맛의 걱정과 그리움이 듬뿍 담겨있다.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찾아오는 마음을 버무려 맛깔나게 담아낸다.



앉아 있는 법이 없으니 미자의 다리에 심장의 길이 울퉁불퉁 튀어나왔다. 매일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는 뒷모습이 조금씩 땅으로 내려앉는다. 미자야 이제는 그만 쉬라고 누군가 말해도 놓을 수가 없는 마음을 누가 알아줄까. 맛있게 먹던 예쁜 입들을, 엄마 생각이 난다던 그 가여운 눈들을 그녀는 모른 척할 수가 없다. 찬바람이 불어오니 올해는 더욱 맛있는 김치를 담글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림자가 기울어진 미자가 새벽 시장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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