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설을 시작하는 방식은 첫째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다. 주인공이 혼자 있을 때, 남들과 있을 때,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상상한다.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만들기 위해서 사건을 추가하고 사건에 대응하는 인물의 레이어를 쌓는다. 사소한 디테일을 추가하여 구체성을 확보한다. 흔히들 말하는 프로파일링과 유사하다. 범인의 습관, 나이, 성격, 직업분석 등등.
물론 평범한 사람이라면 일상에서 범죄자를 상대할 일이 전혀 없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많은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 인물의 분석에 도움이 되었다. 인물 분석은 이야기를 쓰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관계에 여러 번 실패하며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혹은 나를 지키기 위해 삼십여 년 간 하던 일이 그것이다. 사회성이 부족한 인간으로 살아온 삶이 글을 쓸 때에는 다행히 도움이 된다.
2월 말쯤 컨디션이 바닥이었다. 소설 강의 때문에 억지로 꾸역꾸역 완성한 소설은 다시 읽어도 구렸다. 노잼이었다. 두 번 세 번 읽어도 재밌는 소설이 있고 그게 내 소설이면 마치 유능한 이야기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공모전이나 출판사 투고에 수십 번을 떨어져도 그 소설을 심하게는 탓하진 않는다. 이야기는 죄가 없다. 그저 내 미숙한 전달 방식. 나태한 태도. 지금껏 아마추어로 남은 이유.
그래서 시나리오 수업을 신청했다. 서랍 속에 잠들어있는 이야기들. 소설의 형태로서 내보낼 수 없다면 형식을 아예 바꿔버린다면 어떨까. 그러나 소설과 영화가 이야기라는 한 장르로 함께 갈 수 있다는 내 생각은, 여덟 번의 수업을 들으면서 산산조각 났다. 둘은 완전히 다른 장르였기 때문이다.
열의가 넘쳤다. 수강생들도 이 강의를 맡은 유지영 감독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도. 새로운 걸 배울 때 그리고 그게 재미있을 때 나는 열심히 한다. 이에 반해 재미없는 걸 배울 땐 성취도가 바닥을 긴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이러한 성향이 웬만해선 고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여섯 번째 수업에 벌써 초고를 제출한 다른 수강생들과 달리 나는 일곱 번째 수업까지 시놉시스를 쓰고 있었다. 감독님이 계속 반려를 시켜서다. 내가 봐도 시놉시스가 구구절절 설명 일색에 개연성이 부족했다. 소설을 주로 써와서일까. 영화는 무드의 게임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소설이라는 장르는 1인 작업으로서 작가가 글 안에서 필요한 정보를 다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구조가 중요한 영화와 달리 내가 소설을 쓰던 방식이 (구조 없이) 캐릭터가 말하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같이 달리는 식으로 전개되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시놉시스 짜는 게 더 힘들게 느껴졌다. 그러나... 재미있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오래전 충동적으로 샀던 기생충과 청춘시대 각본집도 다시 읽었다.
마지막으로 초고를 제출해야 하는 날이 다행히 일요일이었다. 노트북을 앞에 두고 카페에 여섯 시간을 앉아있었다. 세잔의 커피로 여섯 시간의 집중을 살 수 있다니 카페라는 장소의 힘은 위대하다. 고심 끝에 완성한 시나리오를 마감에 맞춰서 제출했다. 그러나 다음날 다른 수강생들의 작품과 내 작품이 같이 놓인 것을 봤을 때 조금은 초라해 보였다. 열 명의 수강생들은 대부분 이십 대였고 그중 가장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스물두 살의 학생이었다.
어떤 그룹에서나 항상 제일 어린 축에 속했던 내가 삼십 대를 맞이했음을 실감한다. 그들과 나 사이에 십 년의 간격이 있었고 지금도 저렇게 대사를 잘 쓰는데 나중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질없는 생각들. 워런 버핏의 동업자인 찰스 멍거는 일곱 가지 죄악 중 질투가 가장 어리석은 죄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질투는 아무런 쾌락을 주지 않을뿐더러 비참한 감정만 느끼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수강생들의 연령대를 제외하고 이 수업에서 놀란 점이 있다면 내가 제일 구린 글을 써냈던 소설 수업에서 마주친 수강생 한 분을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래서 세상이 좁다는 것일까. 사실 나는 첫 수업시간에 그를 발견하고 조금 껄끄러웠다. 지난 강의의 합평 시간에 그가 내게 악평도 아닌 무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합평을 요구하는 작가님을 향해 이 작품에 대해서 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뒤로 그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합평을 들으며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말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스타일이라면 이번 수업에서도 나 같은 사람은 좋은 소리를 못 들을 것 같아서 껄끄러웠다. 나는 항상 잘 쓰기보다 열심히 써왔으니까. 그러나 마지막 수업 시간에 내 시나리오를 합평하는 시간에 갑자기 그가 손을 들었다.
'저는 시나리오에 대해 따로 말씀드릴 건 아니고요.
이서님을 예전에 다른 수업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그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시나리오를 어떻게 쓰려고 하지라는 마음으로 조금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면서 나를 지켜봤다고 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완성된 초고를 보고 이서님이 노력을 많이 하신 것 같아서 그게 느껴진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감독님이 마지막 수업에서야 이 둘의 관계를 알게되는거냐며 웃었다.
그의 말에서 내 시나리오가 좋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지만 그게 뭐라고 이렇게 브런치에 글까지 쓰게 되었다. 고마웠다. 그거면 됐다. 누구라도 알아주는 사람이 있고 내가 나를 알아준다면 된 거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일주일 정도는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