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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정 소녀 하이디 Sep 09. 2019

서울 나들이

추석 일기 첫째 날

이제 곧 추석이 다가온다. 햇수로 12년째 되는 해외 생활 동안 추석 즈음에 맞춰 한국에 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음력 달력을 따라 날짜가 정해지는 우리의 명절인지라, 양력을 세는 스위스와 일본에서 살면서 스케줄을 맞추기가 어려웠기 때문이고, 평소 출장으로 자주 왔던 서울이지만 8월 휴가 기간을 마치고 오는 때라 9월부터는 유독 바빠지는 탓도 있었다.


어제는 백화점에 가서 동생이 좋아할 만한 케이크와, 조카들이 좋아할 과자들을 샀다. 다둥이 사촌 동생네의 삼 형제를 위해 사려심 깊은 이 고모는 귀여운 토끼 캐릭터가 들어간 같은 종류의 신발주머니를 3장을 샀다. 같은 줘야만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삼 형제의 첫째로 태어난 나도 경험했었지. 추석을 준비하며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 좋은 따뜻함이 좋았다. 그 옛날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 할머니 댁에 가져갈 제사 거리 음식을 사러 갔을 때 느꼈던 설렘도 느낀다. 챙겨야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행복이라는 평범한 진리가 주는 좋은 기분이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선물을 한가득 넣은 짐은 무거웠지만 나의 마음과 발걸음은 솜사탕처럼 가벼웠다. 이제 곧 추석이고 나는 그동안 자주 보지 못했던 가족과, 친구들과, 선배님들을 만나러 서울로 간다.

 

인천 공항 출발 게이트 구역. 일주일 후 나는 이곳에 되돌아오겠지.


시간에 쫓기는 출장과는 달리 시간에 여유가 있는 이번 여행은 호텔까지 나를 데려다 줄 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까지 많은 곳을 들러야 하는 서틀 리무진 버스를 탄 덕에 나는 덩달아 서울 버스 투어를 하게 된 셈이다. 그리하여 시작한 서울 나들이. 올림픽 대로를 타고 밤섬 옆을 지나 여의도로 들어서는 버스. 옛 직장 건물도 보이고 건너편 여의도 공원과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과 산책을 하는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과 데이트 족 젊은 연인들도 보인다. 태풍이 지나간 서울 하늘은 여전한 회색빛이고 그 하늘 아래 여의도도 여전하다. 울뚝불뚝 솟은 높은 건물 사이로 느껴지는 무미건조한 분위기의 이 동네. 서울을 떠나기 전, GMAT을 공부하러 나는 주말이면 회사로 왔다. 이곳만큼 조용하고 넓은 책상이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곳은 없었으니까. 돈도 없고 마음은 삭막했던 나에게 나만의 공간과 마음씨 좋은 아재 선배들을 만나게 해 주었던 그 시절 그곳.


여의도를 떠나 마포를 거처 서울역에 다다른다. 셔틀버스에서 이 역에 내릴 사람이 없기에 기사님은 시원하게 서울역을 패스! 그래요, 저는 빨리 제 호텔에 도착하고 싶어요.


남편 ㅇㅇ이는 스위스로 출장을 갔다. 그를 따라가는 것 대신 나는 한국에서의 추석을 택했다. 혼자 다녀오는 고향길이니 친정집이 있는 세종시로 내려가기 전 호젓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라며 남편은 이 곳 장충동에 호텔을 잡아주었다. 혼자 여행도 곧잘 다니고 출장도 밥 먹듯 하는 나이지만 이렇게 가족들을 보러 가는 개인적인 여행에 ㅇㅇ이가 빠지니 왠지 의지할 곳이 없어 불안해하는 아이처럼 나는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음.. 만난 지 10년, 결혼한 지 5년... ㅇㅇ이가 없는 여행은 왠지 외롭다. 우리의 선배 커플, 45년을 함께하신 ㅇㅇ이의 부모님도 같이 계시면 서로 아웅다웅하시지만 늘 같이 다니신다. 그들이 서로에게서 떨어지면 느끼는 마음이 이런 마음일까?


남산 타워가 보이는 내 방에서


남산 자락에 위치한 이 호텔은 평소 유명 연예인이 결혼식을 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나에게는 이번 서울 나들이의 시작점이자 일본에서 오래간만에 오는 나를 보러 기꺼이 시간을 내어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체크인을 하자마자 나는 한 보따리 푼다. 평소 케이크를 좋아하는 SS를 위해 나는 백화점 지하 늘 줄 서는 사람이 많은 그 브랜드의 파운드케이크 3종 세트를 공수해 왔다. 커피를 타고 티를 우리는 동안 셋째를 임신한 다른 한 친구가 도착한다. 함께한 지 23년 된 친구들이다. 결국 공부는 뒷전이었고 수다가 먼저였던 우리. 지금보다 훨씬 큰 몸집에 얼굴의 반을 안경으로 뒤덮었던 나를 기억하는 그들. 현재 하고 있는 일 이야기며, 시댁 이야기며 왁자지껄 수다를 풀어낸다.


저녁을 먹고 그녀들은 각자의 생활로 돌아갔다. 한 명은 내일의 출근을 준비하고 다른 하나는 장사를 준비하러. 12년의 기간 동안 나는 해외에서 자리를 잡으려고 열심히 뛰었고, 그녀들은 그녀들만의 방향으로 열심히 뛰었다. 각자 다른 나라에 살면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뛰었기에 우리는 서로로부터 멀어질 법도 했지만 이렇게 같이 어린 시절을 보낸 추억은 우리를 23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한 곳에 모일 수 있게 했다. 함께 한 추억과 오랫동안 버텨온 세월이 고맙다.


밤하늘과 한옥과 현대식 건물이 어우러진 서울의 야경


친구들을 보낸 후 올려다본 밤하늘과 건너편 한옥이 밝히는 불빛과 저 멀리 보이는 고층 빌딩들의 어우러짐. 서울의 밤은 세상 어느 도시의 밤보다 아름답고 의미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 있고 고마운 사람들이 있고 나에게 익숙한 장소가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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