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시하라 켄시"감독의 "인생 후루츠"는 삭막하고 적막한 현대의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고 시린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다큐영화였다.
건축가였던 90살 "츠바타 슈이치"와 87살 "츠바타 히데코"부부는 300여 평의 땅에 "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며 15평 작은 오두막을 짓고 70여 종의 과실나무와 50여 종의 곡식과 채소들을 심고 가꾸고 거두며 살아간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 차근차근 천천히 꾸준하게 몸과 마음을 움직여 일을 하고 신체적 심리적 경제적 자립과 자연주의 먹거리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건강하게 살아간다.
부부가 서로 덤덤하게 아끼고 사랑하고 존경하며 애써 추수한 것들을 골고루 상자에 담아 이웃들과 나누는 삶.
나이 들수록 단단하게 익어가는 츠바타 부부의 삶의 지혜와 담백한 모습에 홀린 듯 빠져들었다.
마트의 생선가게 청년에게 음식이 담긴 접시 그림을 그려 가게의 생선 맛있게 잘 먹었다고 고맙다는 감사 엽서를 보내고
노랗게 페인트칠한 팻말에 감성적이고 저절로 미소가 번지는 글귀들을 적어 뜨락 곳곳에 꽂아두고 다음 세대를 위해 건강하고 비옥한 땅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정겹고 따뜻한 마음에 오래 살아 더욱 깊어지고 아름다워진 노부부의 의미 있는 주름살을 보았다.
신도시 프로젝트에서 경제적 논리로 자신의 설계대로 지어지지 않고 산을 마구 파헤쳐 지어진 성냥갑 같은 소도시에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던 그는
헐벗은 민둥산에 밤나무를 심자고 제의해 바람이 드나드는 울창한 숲을 만들고
말년에는 무료로 정신병원의 설계와 자문을 했다는 츠바타 슈우치...
뜨락의 잡초를 뽑고 낮잠에 들었다가 깨어나지 못했다.
죽음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다던 그의 고통 없이 순하게 떠난 이승의 마지막 순간이 나는 너무도 부러웠다.
낮잠과 죽음의 경계마저 희미해진 그의 임종도 혼자 남아 외롭다기보다는 덧없다 했던 히데코의 말도 내 안에 오래 고여있을 것 같다.
자신이 시작하고 이루어 낸 일조차 티 나지 않게 공을 넘기고 덤덤하게 물러서는 겸손하고 사려 깊고 조용한 츠바타 슈우치와 나눔과 감사와 사랑과 배려로 충만한 츠바타 히데코, 자기가 하는 일들이 돌고 돌아 반드시 자신에게 온다고 믿는 긍정의 삶이 그녀가 만든 음식처럼 딸기 케이크처럼 참하고 결이 곱고 향기로웠다.
어린 손녀가 플라스틱을 만지며 노는 게 걱정되어 작은 인형의 집과 그 안의 가구와 집기들을 목재로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들어 선물한 할아버지(그 정성과 사랑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와
그 손녀가 자라 검도선수가 되었는데 인스턴트식품에 길들여질까 우려해 매번 가지가지 할머니표 맛난 음식들을 정성껏 만들어 냉동 포장해서 택배로 보내는 등 굽은 할머니...
내 어머니 아버지도 저 두 분처럼 비슷한 연세까지 살다 가셨다.
300평쯤 되는 터에 온갖 채소와 과일들을 심고 가꾸며 구순이 넘도록 함께 지내셨다.
차근차근 천천히 꾸준하게 아버지는 서재에서 서예를 하시고 책을 읽으시고
차근차근 부지런히 꾸준하게 어머니는 홀로 텃밭에서 구부려 일만 하셨다.
아버지가 당신만의 생각에 몰두하느라 애쓰는 어머니를 돌보지 않고 위로하지 않고 외롭게 해서였을까?
우리 부모님은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음식을 (손 많이 가는 팥죽이며 콩국수 콩나물 잡채도 약식이며 다식 산자도) 매번 정성껏 만들어 드리곤 했지만 감성이 풍부한 예술가 기질의 바람기 많은 아버지와 이성적이고 흑백이 분명하고 책임감이 강한 어머니의 세계가 서로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화면 속 노부부를 보며 부모님 생각을 했다.
서로 배려하고 아끼는 그들을 보며 제각기 따로 잘 노는 우리 부부를 떠올렸다.
우리 부부의 공통분모는 뭘까?
노후를 함께 걸어가야 하는 길동무?
이미 다 자라 저마다 세대주가 된 아들들?
며느리와 손자들?
40년을 줄곳 함께 살아왔는데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게 없다.
화면 속 노부부는 식성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성격도 다르지만 서로 배려하고 아끼고 존중하고 칭찬하는 일상이 평화로워 보였다.
묵묵히 남편의 뜻을 따라주고 남편의 입맛에 맞춰주는 부지런하고 솜씨 좋은 아내의 너그러움이 평화로운 노후의 삶을 이루게 된 것이다.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나조차도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며 40여 년을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평화롭고 따뜻하고 안정되고 행복한 노후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남편보다는 아내의 배려와 인내와 헌신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현실과 마주했던 영화였다.
츠바타 히데코의 환한 미소가 많이 부러웠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는 담백한 삶의 무늬와 켜켜이 쌓인 세월의 내공으로 만들어진 오직 그녀만의 미소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세상에 없는 "키키 키린"의 내레이션
둥그런 목소리에 대숲에 바람 일듯 스치는 허공을 만났던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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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찾아 헌신하고 소신을 지키며 평온하게 살다 츠바타 슈이치처럼 아무런 고통 없이 잠에 들듯 떠나는 것, 그것이 어느새 내 간절한 소망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