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쟁이 May 25. 2024

죄송한데요, 잘못한 건 없습니다?

사과를 잘하는 사람은 분명히 중간 이상이다

최근 음주운전 사실을 극구 부인하며 예정된 공연을 강행한 트로트 가수 김호중의 행보와, 공연일정이 끝난 후 뒤늦게 음주 사실을 인정했음에도 그를 감싸는 일부 팬들의 행태가 화제에 올랐다. 연예인 음주사건은 시대를 불문하고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뉴스지만 대체로 가해자가 큰 사회적 지탄을 받고 사과하거나 아예 활동중단을 하는 식으로 대응했던 것 같은데, 잘못을 저지르고도, 거짓이 들통나고도 오히려 당당한 게 요즘 스타일인가 싶어 정신이 혼미했다.


거짓말을 할 순 있어도 결코 당당할 수는 없었던 지난 시대의 연예인 음주 사건 중 하나라고 하면 나는 다른 무엇보다 2005년 김상혁 음주 뺑소니가 생각난다. 피해의 심각성이나 다른 이유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진술 과정에서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라는 명대사를 남겼기 때문에 유명한데, 이 문장은 '정황상 확실한 사안을 모순되는 말로 부인하는 비유'로써 지금도 (나 같은 옛날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


물론 술을 마셨지만 운전은 다른 사람이 했을 경우에는 모순 없이 성립하는 말이다. 그러나 직접 운전대를 잡은 사실은 분명히 밝혀졌기 때문에 저 문장을 통해 ’음주운전'이라는 개념이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한 상태로 운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의 무식을 유추할 수 있다. 아마도 음주 사실을 빼면 뺑소니에 대한 감형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차마 술을 마셨다는 지인의 진술을 위증이라 주장하거나, 음주 측정 거부 혹은 증거를 인멸할 만큼의 배짱이나 뻔뻔함은 부족했나 보다. 그 시대엔 적어도 그 정도의 도덕은 작용했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1 세대 아이돌 밴드의 인기멤버였던 그는 십여 년간 연예계에서 매장되다시피 했고, 소속 그룹 클릭비도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다.




최근 직장에서 있었던 한 정황을 밝히는 과정에서 곱씹을수록 김상혁의 발언을 생각나게 하는 말을 들었다. 1) 팀장인 본인이 정확하게 인지해야 할 직원의 퇴사일을 확인하지 못했고, 2) 해당 직원에게 적시에 알려주지 못한 것은 자기 잘못이고 부인할 여지가 없다는 사과로 시작하는 말이었다. 그러고 나서 이어지는 말로 그는 사실상 자신의 말을 뒤집었다. 1) 본인은 (내가 당신의 퇴사일을 정확하게 모르겠으니) HR에 직접 물어보라고 했고 2) HR이 날짜를 알려줬으니 해당 직원이 정확한 퇴사일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사건이 일어났던 때로 돌아가보자. 팀장인 그는 퇴사를 앞둔 팀원이 언제 퇴사하는지 모르는 채 해외출장길에 올랐고, 그 출장이 끝나기 전 팀원은 퇴사일을 맞았다. 퇴사일 사흘 전, 팀장 없이 진행했던 그 주 팀회의에서 우리는 당사자에게 ‘언제가 마지막날이냐’라고 물었지만 “모르겠어요. 팀장님이 아마 다음 주 이십 며칠쯤인 거 같다고 했는데…”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는 진행 중이던 업무가 있었고 그 업무 마무리를 언제 어떻게 할지 팀장과 아직 논의하지 못했다고 했다. 정확하게 듣지는 못했지만 아마 ‘이십 며칠쯤’까지 아닐까 추측하는 그에게 팀원 모두가 펄쩍 뛰며 “근로계약서 상의 종료날짜를 먼저 확인하고, HR과 팀장 양쪽에게 그 날짜보다 연장되는지 묻고, 하루 이틀 더 일해야 한다면 일할 계산한 근로수당을 청구하라”라고 말했지만 우리가 듣기에도 그간 같이 일했던 팀원이 퇴사를 하는데 업무 마무리도 논의하지 않고 팀장이 직접 인사도 없이 보낼 리 없으니 아마도 본인이 출장 후 복귀한 뒤에 마무리할 수 있게 팀원의 근로기간을 며칠 연장했겠거니 했다. 그러고 나서 이틀 후, 퇴사 하루 전이 되어서야 당사자에게 이십 며칠이 아니라 내일이 마지막인 것으로 확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팀장님 복귀 전 컴퓨터를 반납해야 하니) 지금 하고 있는 업무는 아마 주말에 마무리해서 카톡으로 넘겨야 할 것 같아요.”라는 말도 함께.


내가 미안할 일도 아닌데 이 황당한 이별 앞에서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들어 내가 놓친 게 없는지를 찾았다. 정신없이 출장 가는 팀장에게 내가 이 사람의 퇴사일과 절차를 물어보고 인계받았어야 했나? 퇴사가 결정된 시점에 팀장에게 퇴사일이 언제인지 끈질기게 물어봤어야 했나? (처음 퇴사 내용을 들었을 때 한 질문이었지만 당시 그는 나에게도 ‘아마 이십 며칠’이라고 말했었다.) 채용이 중요한 만큼 퇴사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내가 속한 기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건 확실히 일할 동기와 기관에 대한 신뢰를 크게 깎아먹는 일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고 누가 무엇을 놓친 건지 분명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HR팀에 이 과정에 대해 질문하자, 담당자는 ”퇴사일은 팀장에게 이미 정확히 알려드린 바 있고, 오늘(직원 퇴사일) 아침에 ’XX직원이 오늘 까지라는 게 사실인가요?‘라는 메시지를 보냈길래 지난번에 퇴사일을 알려드린 메시지를 캡처해서 보냈다”라고 답했다. 어디에서 펑크가 난 사건인지 명백해지는 순간이었다. 팀장이 분명한 자기 할 일을 미루며 분명하지 않은 의사소통으로 혼란을 야기한 상황으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는.


성인이니까 알아서 자기 일 잘하고, 챙길 거 스스로 잘 챙기는 건 두말할 필요 없는 직장생활 미덕이다. 하지만 몇 개월을 함께 일한 팀원의 마지막날이 언제인지 듣고도 까먹어서 챙기지 못한 팀장이 팀원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결코 아니다. 직속 매니저가 애매한 퇴사일을 말하며 끝맺지 못한 업무를 남기고 자리를 비웠는데, HR이 그와 전혀 다른 퇴사일을 말했을 때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물론 퇴사를 하는 당사자가 필요한 정보를 명확히 묻고 정리하는 게 좋겠지만 애초에 불명확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퇴사일자에 맞춰서 업무 마무리 일정을 계획할 책임은 관리자에게 있다.


팀원이 떠난 다음 주에 출장에서 돌아와 ‘내 잘못은 있지만, 이 사태에 책임은 없다’를 남은 팀원들에게 말하는 그가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던 김상혁과 겹쳐 보였다.


잘못을 인정할 때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애매한 양심과 눈치, 억울함이 뒤섞인 마음으로 ’ 내 잘못은 미안한데 사실은 이렇다 ‘는 말을 늘어놓는 건 결국 ‘이게 잘못이라는 사람들의 인식이 있으니까 인정은 하는데, 결국 사고가 난 건 내 잘못 때문은 아니다’라는 말을 아주 비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사과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비겁한 자기변명일 뿐. 차라리 잘못이 없다고 우기기라도 했으면 그냥 실컷 싸우면 그만인데, 죄송은 한데 잘못한 건 없다는 말을 듣는 입장에서는 참담하기까지 하다. ’의도도 나쁜 데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논리도 없구나‘


‘인간적인 예의를 갖추지 못한 폭력적인 퇴사과정이었다’라고 말하자 “퇴사일자를 HR이 알려줬는데 뭘 더 어떻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건지…”라고 답하는 그에게 ‘사과해야 할 것은 당신이 야기한 불명확함과 직무유기’라고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사람과 대화가 길어진다 한들 서로 감정만 상할 테니.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 이 사건과 그 과정을 되짚는 과정에서 내가 확실하게 얻은 건, 수동적, 회피적, 방어적인 의사소통 방식에 대한 사례내가 일하고 싶지 않은 조직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스스로 정리하고 끝내기로 했다.


사과를 잘하면 중간 이상은 간다


잘못했으면 사과를 하라는 가르침은 또래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가르치는 가정교육 필수 커리큘럼 같은데, 정작 학령기를 지난 사람들 중에 '사과'를 잘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명백한 자기 잘못 앞에서도 사과할 줄 모르는 사람, 이도저도 아닌 미적지근한 유감의 말을 사과라고 내놓는 사람, 사과를 한다고 해놓고 자기변호에 바쁜 사람 등 여러 사례를 맞닥뜨릴 때마다 나를 돌아보며 자연스레 '사과하는 어른'을 내 장래희망 삼게 되었다. '장래'니까 아직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고, '희망'이니까 앞으로 계속 노력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리고 거기에 사과를 ‘잘’ 하는 사람이 되리라는 다짐을 슬쩍 덧붙여본다. 내가 잘못한 일이 야기한 문제를 똑바로 보고 축소하려 하지 않는 것,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통찰과 판단력이 전제 조건이다. 사과를 잘하는 건 보통 능력이 아니다. 사과만 잘해도 중간만 간다는 말은 틀렸다. 사과를 잘하는 사람은 분명히 중간 이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리더의 결정권을 팀원과 분담해서는 안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