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에 얽힌 가슴 아픈 추억 하나
고사리가 내게 주는 느낌은 여러 가지다.
고사리 꺾는다며 멀리 산행을 나가시던 어머니가 생각나고, 한밤중에 탕국과 함께 먹던, 고사리가 들어간 제삿밥도 먹고 싶어 진다. 그리고 또 곡괭이 들고 도라지 캐던 어린 시절도 생각나고, 왜관에서 카투사로 군 생활할 때 미팅했던 성이 고였고 이름이 사리였던, 그 고사리도 생각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사리에 얽힌 황당한 추억이 하나 생겼다.
유럽 사람들은 고사리를 먹질 않는다. 그래서 외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 4월이면 연례행사처럼 즐기는 것 중의 하나가 고사리 꺾으러 산에 가는 일이다. 한 식구만은 쓸쓸하니 여러 집이 어울려 가는데, 지난봄 이웃 세 집이 모여 이스탄불 근교 산속엘 갔다.
산속 도로 한쪽에 주차하고 고사리를 꺾기 시작했는데, 애들은 애들끼리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어울려 고사리를 찾아 산속으로 들어갔다. 나도 비닐봉지를 하나 들고 집사람이 마련해 준 장갑을 끼고 산속 고사리를 만나러 나섰다.
고사리는 크고 나면 먹질 못하니 잎이 나기 전인 어린싹만을 따야 한다. 이것들도 놔두면 잎을 피우고 잘 자라겠지만 재수 없게 나의 눈에 띄어 그만 불구의 몸이 되고 마는구나 생각하면 가슴 아픈 노릇이다. 하지만 이미 작정하고 이곳을 찾은 상황이고 보면, 내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이들이 누릴 운(運)의 전부이다.
한참을 따다 보니 지은이(둘째 아이)랑 다른 아이들이 보였다. 그쪽에 고사리가 많은가 보다 싶어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고사리 밭이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따고 나서야 아이들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많이 따는 것이 목적이 아닌 아이들에게서 아무런 눈총도 받지 않았다.
그럭저럭 1시간이나 지났을까? 함께 간 대우 아저씨(대우에 다니는 아저씨)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여자들이 내 봉지를 보면서 많이 땄다고 하는데 괜히 보여주기 싫었다. 왠지 감추고 싶은 유치한 경쟁심리가 발동했다고나 할까? 차 트렁크에 봉지를 넣고서야 마음이 홀가분해졌으니!!
다들 모였는데 집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목소리가 또렷한 지은이 보고 엄마를 부르라고 하니 지은이가 몇 차례 엄마, 엄마.... 불렀다. 그리고는 차 안에 들어가 놀기에 지난번 한국 출장 때 사온 가요 CD를 틀어 애들의 흥을 돋우고는 집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이상하게 나오질 않았다. 대우 아저씨가 ‘우혁(첫째 아이) 엄마’라고 외치는데, 난 왠지 소리치기가 쑥스러웠다. 그냥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차 경적만 몇 차례 울려 보았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엥^ 갑자기 머리에 피가 몰리는 걸 느꼈다.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지은아, 지은아, 부르면서 뛰어다니는데 웬 가시덤불이 그리 많은지. 하지만 통증이 전달되지 않았다. 산속 후미진 곳을 살피고, 쓰러져 있는 임시 움막도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헤매다가 다시 원위치해 봐도 여전히 집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지 않은 숲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불길한 생각들이 하나씩 스치면서 막 뭔가를 외치고 싶은 욕구 때문인지 목 주위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고사리 따러 갔다가 마누라 잃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뭐랄까! 그리고 또 이런 경우가 있기나 했을까?
정신을 잃고 헤매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대우 아저씨 전화다. 돌아오란다. 집사람이 왔다고.
이런 경우, 집사람 같으면 엄청 화를 낸다. 하지만 난 다행이다 생각하고 오히려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 감사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얼굴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차를 타고 혼 내줄까 했지만 다른 아줌마가 있어서 참았다.
장소를 옮겨서는 나도 모르게 자꾸 집사람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는데, 자꾸 부른다며 짜증 섞인 대답이 돌아온다. 이런 놀란 가슴도 모르는 소갈머리라니!!! 앞으로 고사리 딸 일은 없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지은이 왈 “아빠, 오빠 머리가 고사리처럼 보여.” 정말 그랬다. 큰 고사리처럼 보였다. 다음 날 아침, 지은이는 또 “어젯밤 자려는데 고사리가 계속 떠올랐어. 아빠는?” 나도 그랬다. 그 곱디고운 고사리의 모습이 나에게도 떠올랐었다. 다만, 내 가슴을 답답하게 하면서.
옥상에서 이스탄불의 뜨거운 햇볕을 받은 고사리는 할머니와 엄마의 손길을 타지도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내가 보아왔던 그 고사리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2005. 7월 이스탄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