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꿈치 뼈 부러질 뻔했어요
태풍이 오고 있다는 뉴스를 봤는데도 아침에 서둘러 나오다 보니 우산을 챙기지 못했다. 다행히 버스 타는 곳까지 걸어가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버스에 오르자마자 비는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지하철로 갈아타기 위해 버스에서 내렸을 때에도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맞기에는 좀 많이 오는 정도. 바로 앞에 편의점이 보여 투명 비닐우산을 살까 잠깐 고민했다.
‘에이.. 좀 걸어가면 다시 지하철 타는데 뭐, 일단 그냥 가자.’
평소 성격대로 단순하면서도 무던하게, 나는 비를 맞으며 지하철 입구를 향해 걸었다. 우산을 안 쓴 데다가 바닥 여기저기의 크고 작은 웅덩이 때문에 오늘 신고 나온 슬리퍼 안으로 빗물이 들어왔다. 올여름에 새로 장만한 바닥이 납작하고 뒤꿈치가 뻥 뚫린 슬리퍼. 오늘 이 신발이 사건의 발단이 될 줄이야.
바로 덥디 더웠던 여름 내내 편하게 잘 신고 다녔던 슬리퍼가 ‘비’라는 변수를 만나자 맥을 쓰지 못하고 신발의 기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평소 쿠션 때문에 편안하다고 생각했던 신발 바닥은 비와 만나면서 손에 쥔 미꾸라지처럼 미끄덩미끄덩 거렸다.
발 뒤꿈치를 지지하는 끈도 하나 없는 형태의 신발인 탓에 비가 오는 날에 거리를 걷자니 이리 삐뚤 저리 삐뚤 중심을 잡기 힘들었다. 왕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간신히 지하철로 들어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렸다.
평소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에 오른쪽 줄에서 가만히 기다리기보다는 왼쪽에서 빠르게 걸어가는 편이다. (사실 오르막이든 내르막이든 에스컬레이터는 항상 걷는다. 정말 긴 에스컬레이터를 만나면 아이고 여기 이렇게 헬스장이 있네 하면서 신나게 걸어간다) 오늘도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상관없이 습관처럼 에스컬레이터 계단을 내려갔다.
“드르륵 쿵”
두 발짝쯤 내려갔을까. 미꾸라지 같은 신발 바닥과 비에 젖은 발바닥이 만나면서 제대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두 계단 정도를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고 양쪽 팔꿈치를 계단 어딘가에 세게 박았다. 2초 정도 잠깐 지구가 나를 위해 정지한 것처럼 멍한 시간이 흘렀다. 바로 앞에 아저씨가 뒤를 돌아봤다. 종아리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있던 터라 아무렇지 않은 척 후다닥 일어났다. 다시 나의 평소 습관대로 씩씩하게 걸어내려가고 싶었지만 왼쪽 엉덩이 윗부분과 오른쪽 팔이 얼얼해 도무지 움직일 수 없었다.
일단 이 모든 일들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났다. 너무 아팠지만 다행히도 걷기는 할 수 있었다. 정신을 못차리는 상태 속에서도 나는 일단 출근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른쪽 팔이 얼얼해 왼손으로 휴대폰 뒤에 붙은 자석 지갑의 카드를 꺼내 개찰구를 통과했다.
다시 한번 만난 긴 에스컬레이터. 도무지 걸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조용히 오른쪽에 서서 몸을 맡겼다. 플랫폼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타야 할 급행이
도착했다.
‘아 너무 아파… 괜찮아지겠지..? 일단 가자.‘
오른쪽 손 끝의 찌릿함을 느끼며 간신히 급행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었다. 고속터미널 역에서 동작까지, 약 3분 정도 급행으로 달려가는데 갑자기 속이 울렁이면서 구토를 할 것 같았다. 상체를 최대한 움츠리고 지하철 문에 살짝 머리를 댄 채 가까스로 섰다.
‘다음 내리실 역은 동작 동작 역입니다’
노량진까지 가야 하지만 도무지 더 서있을 힘이 없다고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동작역 문이 열리자마자 내렸다. 밴치에 앉아 최대한 진정을 해보려 했다. 왼손으로 폰을 눌러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나 에스컬레이터에서 미끄러졌는데 지금 너무 토할 것 같아.”
상황을 이야기하자 놀란 남편이 지하철에 신고를 해보겠다고, 지금 위치가 어딘지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그때, 지하철에서 승하차를 도와주고 계시던 한 어르신께서 내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얼굴이 창백해요. 여기 안전실에 연락해서 물 좀 가져와달라고 할까요? “
“네 부탁드려요. 아까 넘어졌는데 지금 좀 힘들어요.”
그렇게 어르신의 도움으로 지하철에 근무하는 직원 두 분이 물을 들고 와주셨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니 토할 것 같은 상태는 조금씩 진정이 되어갔다. 가방을 들어주셔서 지하철 내에 있는 안전실로 이동했다. 119를 불러주셔서 응급 구조대원이 오셨고 혈압을 재고 팔 상태를 봐주셨다.
응급 구조대원은 팔을 움직일 수는 있어 응급실까지는 안 가도 될 것 같은데 실금이 갔을 수도 있으니 정형외과를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결국 그곳에서 몇 분 더 안정을 취한 뒤 감사 인사를
하고 근처의 정형외과로 갔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타박상이 있어 얼음찜질과 전기 물리치료를 받았다.
납작한 슬리퍼와 빗물의 만남으로 빗어진 에스컬레이터 미끄럼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됐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일은 또 왜 이리 바쁜지 정신없이 일을 하고 나니 퇴근 시간이 다가와 있었다.
오늘 퇴근길만큼은 에스컬레이터에서 조신하게 몸을 맡긴 채 얌전히 있었다. 사실 또 미끄러질까 봐 무서웠다. 오늘따라 발목까지 오는 형형색색의 장화를 멋들어지게 소화한 패피들이 눈에 띄었다.
‘장화는 패션 아이템인 줄만 알았더니… 비 오는 날엔 저렇게 빗물이 안 들어가는 신발을 신어야 하는거구나 ‘
장화는 젊은 친구들이 멋 부리려고 신는다고 생각했던 나의 편견이 바사삭 깨졌다. 장화 구매까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적어도 비 오는 날 슬리퍼만큼은 신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솔직히 오늘은 나름 비싸게 주고 산 슬리퍼인데 이렇게 다치기까지 하니 신발을 쓰레기통에 넣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성을 되찾고 다시 생각해 보니 슬리퍼는 아무런 죄가 없다. 죄가 있다면 비 오는 날 납작한 슬리퍼를 고른 나의 신통방통한 능력(?)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집에 다 와가서는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이만하기에 천만 다행이다 ‘라고.
*표지 사진 출처: 게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