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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상심리사 윤제학 Oct 24. 2022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의 함정

평생 연기를 하면서 살 순 없잖아.


우리의 머릿속 생각을 곰곰이 관찰하다 보면,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의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부정적인 생각이 스스로를 힘들게 만든다는 것을 문득 알아차린다.

내담자의 이야기 (1)
  
  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항상 불안하다. 무슨 일이든 시작할 때, 두려움과 자신 없음을 먼저 느끼고 나보다 항상 앞서가는 동료가 떠오른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항상 뒤처졌으며 친구들보다 뛰어난 부분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는 항상 하위권이었고 그렇다고 운동이나 예술 분야에 소질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뭐든 잘하지 못했고 어려웠던 기억밖에 없다. 당연히 성격은 소심하고 자신감이 없었다.
부모님은 자신감을 가지라며 나를 들들 볶았지만, 나도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그게 성인이 된 지금까지 이어져 왔고, 미래의 내 인생 또한 마찬가지로 그럴 것 같다.
여전히 인생은 나에게 힘든 것일 뿐이고, 그저 그렇게 살다 끝날 내 인생 처지를 생각하니, 오늘도 도저히 무언가 할 의욕이 생기질 않는다.
 내담자의 이야기 (2)
 
  친구의 소개로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상대방은 어땠냐고? 잘 모르겠다. 너무 떨리고 불안했기 때문이다.
사실 상대방이 마음에 들고 말고는 내 안중에도 없다. 누군가를 만날 때면, 상대방의 의중, 표정과 반응 하나하나에 내 모든 신경이 쏠리기 때문이다.
오늘 왠지 그가 나를 보는 모습은 무언가 탐탁지 않은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재미가 없는 탓이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매력이 없고 재미가 없다. 항상 그래 왔다. 말주변이 없었고 어수룩해 보이는 외모 탓에 나는 항상 인기가 없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모르긴 몰라도 나는 부모로부터 사랑받은 적이 없었다.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고 그것은 아마 어릴 적의 양육환경, 나를 사랑하지 않은 부모님 탓이라 생각한다.
이내 내 과거와 인생이 한탄스러워진다. 더 이상 그 누구라도 사람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 혼자 살다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는 고민이 있을 때

혹은 걱정을 하며 혼잣말을 읊조리거나 홀로 생각에 잠길 때면,

자신의 마음속 부정적인 생각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부정적인 생각이 자신의 상황을 해결하기는커녕 마음의 안정을 방해하고 더욱 안 좋은 상황으로 이끌어나간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는 자신의 문제점은 부정적인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이라고 결론짓고 그러한 고리를 끊어내야겠다고 결심한다.

아니, 끊어 내는 것을 넘어 긍정적인 생각으로 고쳐보겠다고 마음먹는다.

티브이에서, 언론에서도 항상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했었던 말을 떠올리고 그 말을 한번 시도해보겠다고 생각한다.


 심리적인 괴로움을 안고 있는 사람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흔히 듣는 충고 중에 하나가 "긍정적으로 생각해"라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최악을 상황을 자주 떠올리는 이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도 모르는 게 아니야.' '사실 나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내가 싫어.'

그리고 그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 인생에서 긍정적인 게 손톱만큼이라도 있어야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지"라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온다.


 우리들은 부정적인 생각을 끊어내기 위해서 억지로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보려고 노력도 해본다.

그러나 여태 부정적인 생각이 익숙했던 터라 일부러 짜낸 긍정적인 생각은 어색한 발연기를 하듯 머릿속으로 어색한 연기를 하는 느낌이다.

가만 보면, 그건 진짜 우리 자신의 생각이 아니다. '아,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또 하다니.' '또 긍정적인 인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걸 보니, 나는 태생이 부정적인 사람이구나'라는 자괴감만 커진다.


 무조건적인 긍정적 마인드만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좋지 않은데 어떻게 웃음을 지을 수 있겠는가? 옆구리 쿡쿡 찔려 짓는 미소에는 행복이 없다. 나쁜 것은 나쁜 것이고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란 글귀 하나에 지금 맞닥뜨린 최악의 상황을 바라보며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그게 되지가 않는다.

이 상황에서 좋은 점이 뭐가 있고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라는 생각만 가득 찬다.


 그럼에도 억지로 '그래, 그냥 좋게 생각하자. 좋게.'라고 찝찝하게 마무리 짓는다. 이것은 사고의 전환이 아닌 그저 억압이자 부정일 뿐이다.

넘쳐흐르는 냄비의 뚜껑을 눌러 닫는다고 넘치지 않을 리가. 무엇 때문에 넘쳐버리는지를 알고, 불을 줄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우리는 여태까지 끓어 넘치는 냄비의 뚜껑을 막아 누르는 것에만 신경 썼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생겨 표출되어야 할 우리의 감정은 억압하면 할수록 더욱 부풀어 오른다.


 앞서 언급한 코끼리의 역설처럼 우리는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억압하려 든다.

그러나 억압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코끼리로 가득 차 5초가 지나기도 전에 우리의 머릿속은 코끼리 농장이 되어버린다. 감정 또한 그렇다. 화가 날 때나 우울할 때, 걱정이 떠올라 불안할 때,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잊으려고 하거나 억압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성공하기 어려운 과제다.


 대책 없는 무모한 억압은 정서를 더욱 강화시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감정을 다루어야 하는가?

내가 제시하는 답은 바로 중용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중용이다.

강한 색깔과 같은 극단은 자연스럽지 않다. 뭔가를 억압하려 하고 참고, 작위적으로 바꾸려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효과적인 전략이 아니다.

재미없고 활력이 없어 보이지만 그저 밋밋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것이 자연스러운 법이다.

부정적인 생각에 갇혀 있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하지만 긍정적인 생각에 집착하는 것도 극단적인 모습이다. 그렇다. 우리는 굳이 긍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모든 세상 만물에는 필연적으로 양면이 존재한다. 당근을 제 아무리 작게 잘라도 양쪽 면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 세상에 물리의 법칙을 거스르고 한 면만 존재하는 것은 없다.

우리 주변의 사건과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 또한 양면이 있어서 부정적인 면이 존재한다면, 필연적으로 긍정적인 면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쪽만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한쪽에 집착하는 순간 괴로움이 시작된다.


 유명한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의 말을 빌려오자면,

과도한 작위적 긍정 해석은 부정적인 심리상태인 열등감의 과잉보상이라고 하여, 내면에는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미해결 된 채 억압되고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것들은 복잡하게 얽혀 콤플렉스가 되고 나중에는 의식할 수 없는 부작용을 낳는다.

따라서 우리는 중용으로써 모든 면을 볼 수 있는 다각화된 시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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