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일기를 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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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게 제일 좋고 친구들이랑 모이는 것이 최고 즐거웠던 초등학교 방학 시절마다 제일 싫었던 것은 바로 일기 쓰기였다.
계속 미루다 개학 며칠 전에 부리나케 벼락치기를 하고, 무슨 일을 써야 할지 고민하는 것을 매 방학마다 반복했으니. 틀린 맞춤법을 정정해주거나 짧은 코멘트를 달아주시던 선생님의 빨간 색연필도 생각나고. (“친구와 화해하는 것은 어떨까?” 또는 “선생님도 그 그림을 보고 싶구나" 같은) 그날의 날씨가 생각나지 않아 집에 굴러다니는 신문을 뒤적여서 과거의 날씨를 추적하던 것도 생각난다. 이쯤 되면 나의 화석 농도를 유추할 수 있을 듯 하니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자.
그렇게 일기 기피자였던 어린이는 자라서 일기 애호가가 되었다(!)
정작 어른이 되어 아무도 시키지 않는데도 꾸준히 일기를 쓰고 있고, 이 행동이 내 멘탈 관리에 굉장히 좋은 영향을 주고 있어서 지인들에게도 종종 일기 쓰기를 적극 추천하고 있다. 오늘도 문득 일기를 쓰다가 내가 왜 이걸 쓰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쓰면서 좋았던 것들, 어떻게 쓰니 더 좋았는지 정리해보고 싶어서 이렇게 몇 자 남겨본다.
내가 일기를 쓰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즐겁게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 감동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핸드폰으로 사진, 동영상을 쉽게 찍을 수 있다 보니 사진첩만 들춰봐도 대충 그 당시의 기억이나 상황을 떠올릴 수 있어서 꽤나 편하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스크린에서 열외 되고 놓친 에피소드, 이벤트들은 자연스럽게 잊히는 것이 아쉬웠다. 분명 즐겁게 다녀왔는데도 그 당시의 내 감정을 다시 들여다보기 힘들다는 점이 나에게 “뭔가를 기록하고 싶다"라는 자극을 주었다.
모든 것을 잘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 스스로가 그렇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글로 잡아서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조금만 검색해보아도 하루를 기록하기에 편리하고 좋은 웹/앱 서비스가 많다.
나도 잠시 ropipi라는 서비스나 (지금은 서비스가 중단된 듯하다) 하루.라는 앱을 사용하면서 간단하게 사진 한 장과 글을 남기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손으로 직접 글을 쓰는 것이 제일 좋고 지금도 수기로 작성하고 있다.
잉크가 종이에 스며드는 것,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 쌓인 페이지들을 볼 때, 뒷면에 남겨진 글씨 자국들에서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매일 컴퓨터 앞에서 일하거나 스마트폰을 보며 하루를 보내는 내 생활에 시공간을 초월하는 낯선 아날로그 순간을 만드는 기쁨이 있다.
처음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몇 년 전에는 연말/연초에 꼭 다이어리를 샀었다. 예쁘고 독특한 디자인의 다이어리들을 볼 때마다 하나씩 수집하고 싶기도 했고 날짜가 미리 기입되어 있는 편리함도 누리고 싶고 (소비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개인적으로 쓰는 것이니 최대한 자유롭게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날짜가 기입되지 않은 평범한 유선 노트를 선호하는 편이다. 날짜를 건너뛸 때 느끼는 일종의 죄책감(?)도 없고 글의 분량이나 공간 상관없이 자유롭게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도 그린다. 일단 쓰고 그리고 남겨놓고 보자!
다만 필기도구는 가장 손에 피로가 적은 나에게 맞는 펜을 사용하는 편이다. 좋아하는 펜으로 미끄러지듯 글을 써 내려갈 때의 즐거움은 덤이다.
모든 나날들이 특별하지는 않다. 그럴 때는 그냥 제친다.
그 대신 평범한 하루였어도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꼭 적어두려고 한다. 퇴근 후 친구를 만나 즐거웠던 것이나,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을 겪고 매우 심란했던 일 등등. 어떨 때는 2, 3일 치를 몰아서 쓰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daily가 아니라 weekly가 될 때도 있는데 (반성) 선생님께 검사를 받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쓰고 있다.
하지만 꼭 1일 1 기록을 하는 때가 있는데 그때는 여행 갔을 때이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만큼 꼭 자기 전에 글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그 날 느꼈던 점들을 꼭 적어두고 있다. 쓸 때 제일 피곤하지만 이때 일기가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제일 재밌다는 것이 함정.
제일 어려운 것이 제목 붙이기 인 것 같지만 아무 제목이나 일단 붙여놓고 본다.
별 일 없이 산다 (그냥 평범한 날)
온 누리에 어벤저스 (영화 보고 그 무드 속에서 하루를 보낸 날)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종량제 봉투가 필요하다 (좋지 않은 일로 계속 침체되는 날) 등등.
처음 붙인 제목으로 인해 더 많은 것을 쓰고 싶을 때도 있지만, 보통은 제일 첫 칸을 비워놓고 쓰다가 중간, 또는 마지막에 제목을 붙이는 편이다. 이렇게 타이틀을 붙여보면 제목만 봐도 이 날의 인상이 다시 떠오르기도 하고, 두서없이 쓴 글이 마무리되는 느낌도 들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가장 추천하는 바이다.
사실 글을 쓰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리고 글, 그림, 미디어 등 도구를 통해 온전히 나를 표현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일기는 나만의 기록이고 스스로가 작가이자 독자이기 때문에 100% 공감할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매번 일기를 쓸 때마다, 글로써 나의 생각을 구체화할 수 있어 감정 컨트롤을 할 수 있고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음을 느낀다.
위의 내용들은 나에게 최적화된 일기 쓰기 방법이지만, 누구든지 스스로에게 가장 쉽고 편한 방법으로 조금씩 자신만의 하루를 기록하고 가끔 들추어 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