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 수능은 2015년 11월 12일이었다. 출정 전, 출사표를 올리며 나는 아버지께 당부했다. 혹시 모르니 소주 한 병과 담배 한 갑을 준비해주시오. 망치면 삐뚤어질 것이오니. 아들의 우스개를 그대로 맞받아준 아버지는 참이슬 후레쉬 한 병과 디스 플러스 한 갑을 사두었다. 나 역시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아들이어서, 예정대로 수능을 망치고 돌아와 병나발을 불고 담배에 불을 댕겼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빠그라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3 때, 나는 퍼져버렸다. ‘내가 지금 퍼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퍼져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와 방안에 숨어들었다. 그리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게임과 예능으로 밤을 새웠다. 골방에서 혼자 맥주 마시는 즐거움도 고3 여름에 처음 배웠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으나…아늑하게 망해가는 느낌을 나는 꽤 좋아했던 것 같다.
대학원 졸업까지 목전이니 이제 저 때의 일도 빛바랜 옛날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어디 가서 고3 후기를 마음 편히 이야기하지는 못한다. ‘너도 결국 나약해서 현실로부터 도피해버렸구나’ 뇌까리는 이야기를 들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3자가 함부로 단정하도록 내버려두기에 열아홉 살의 나는 분명 너무도 많이 지쳐 있었다. 손길을 건네준 이들도 그다지 고맙지 않았다. 나는 예절, 체면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싶었다. *
그 시절 예민했다는 것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발톱이 빠졌을 때 드러난 맨살 같았다. 세상은 내가 더 강해져 여렸던 과거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리라’ 기대했겠지만 글쎄.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두고 온 사람처럼 내 열아홉 살을 뒤돌아보며 그 언저리를 서성거리나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는다. 반복해서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는다. 그 시절의 실패로부터 나는 아무것도 반성하지 않는다.
사춘기여서 그랬구나 하는 말은 서른이 가까운 지금도 듣기가 싫다. 나는 그 시절을 사춘기로 명명하며 내 삶의 이례로 유리시킬 수 없다. 그때는 내게 언제나 현재이다. 올해 수능도 끝났다. 여지없이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한 채 위로와 충고를 퍼붓는다. 속절없이 맞고 있을 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고통은 소통할 수 없는 것이므로 아픈 시간은 외롭다. 추스를 때까지 그 시간을 만끽할 수 있기를 빈다. 열아홉 살의 나를 본다. 부둥켜 운다. **
*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 수도의 목적은 얼싸안음이다. 다시 박완서.
<C>
2024. 11. 14. <고대신문> 2009호 '냉전'
[그림 정보]
1. Tim Eitel, Asleep, 2013
2. Tim Eitel, Man Lying in Grass, 2018
© Tim Eitel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VG Bild-Kunst, Bo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