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들에 대한 의문과 무아의 상태
살면서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갑자기 치고 들어온 질문에 잠시 고민을 해봤다.
죽음이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어렸을 적 막내 이모네와 함께 완도 명사십리 해수욕장에 놀러 갔을 때다. 요즘은 아이가 사용하기 좋은 작고 디자인도 예쁜 튜브들이 많이 나오지만, 그때는 아이용 튜브가 흔하지는 않았다. 얌전하지만 조용히 말썽부리던 아이였던 나에게 타이어처럼 생긴 커다란 검은 튜브가 눈에 들어왔다. 2층 높이 담벼락을 뛰어다닐 정도로 무서움이 없었던 때였으니, 낑낑거리고 끌어야 했던 그 튜브를 가지고 바다를 나갈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20분 뒤 해변이 보일까 말까 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손에 힘이 빠진 난 물로 빠져들었고, 어린 나이에 이렇게 죽는 건 가라는 생각이 얼핏 지나갔다.
잠시 정신을 잃었지만, 눈을 떠보니 다행히도 해변이었고, 나중에 들어보니 날 발견한 어머니와 이모가 헤엄쳐서 들어왔으나 와류에 휩쓸려 셋 다 떠내려갔다고 한다. 해수욕 시즌이었기에 구조대가 있었고, 우린 구조대에 구해졌다.
하지만 이게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다고 순간에 대한 대답으로 적당할까?
단순히 놀라운 경험이나 신기한 경험으로 기억에 남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를 던져줄 수 있어야 기억에 남는다고 할 수 있다면,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순간이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테이크 오프!”
물결에 반사되어 눈을 찌르듯 아플 정도로 반짝이는 햇빛, 자기도 모르게 아랍인들을 권총으로 쏘았던 뫼르소의 마음이 이해된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옮기면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모래사장을 간지럽힌다. 강화 스티로폼 재질로 된 기다란 보드 위에서 한참을 패들링 하다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본다. 내게 허락된 파도는 무엇일까. 몇 번 파도를 잡아보지만, 생각보다 파도 위를 선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게 몇 번의 시도 끝에 테이크 오프(서핑 보드 위에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에 성공하고 해변을 향해 미끄러져 나간다.
서핑 보드 위에 처음으로 일어나서 해변을 향해 미끄러지던 순간, 과연 내가 파도를 이겨내고 보드 위에 서는 것이 가능할까 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안하게, 테이크 오프는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하얗게 부서지던 거센 파도 위는 마치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자전거 위에 있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지만 파도에 실려 앞으로 나아가던 순간 이후, 매년 나는 서핑을 위해 제주도로, 동해로, 해외로 나가곤 한다.
서핑의 어떤 면이 그렇게 매력적이었을까?
짧은 이야기 하나를 읽어보자.
지나가던 여우가 아름다운 춤을 추고 있는 공작을 보며 이야기한다.
“정말 아름다운 춤이야. 어쩜 이렇게 완벽하게 움직일 수 있지?”
“난 춤을 수천 번 춰서 이미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눈감고도 아무런 생각하지 않고도 앞으로 항상 같은 자세로 춤을 출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공작은 또 완벽한 자세로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때 여우가 다시 묻는다.
“그런데 방금 깃털이 움직이고 나서 다리는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인 거야?”
잠시 생각한 공작은 춤을 다시 추지만,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던 자신의 춤이 부자연스러움을 느낀다.
살면서 너무 당연한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 이야기 속 공작의 춤처럼 당연한 것은 의식적인 판단이나 결정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숨을 쉬는 것, 밥을 씹는 것, 걸음을 걷는 것, 넘어질 때 손을 내미는 것은 의식적인 결정 없이 이루어지는 과정들이다. 이것은 뇌의 효율적인 활용이 본능인 인간이기에 의식적으로 생각하려 한다고 해서 쉽게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야기 속 공작처럼 자신의 자연스러운 동작에 생각을 집어넣기 시작하자 오히려 실수를 하고 부자연스러움을 느낀다.
서핑의 테이크 오프 과정은 ‘일어선다'라는 우리가 어릴 적 한번 벽을 넘었고, 이제는 매일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동작이다(물론 자세는 좀 다르더라도). 하지만 그것이 파도 위 흔들리는 서핑 보드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과정이기에 쉽게 성공하지 못한다. 자신은 자꾸 실패하면서 성공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 일어나는 과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평소에는 해보지 않을 일어나기에 대한 고찰을 해본다. 물론 동작을 하나하나 구분해서 고민하고 연습할수록 이야기 속 공작처럼 더 부자연스러워진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모든 동작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며 보드 위에 일어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요즘 아침에 시간이 허락하는 한 명상을 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가부좌하고 앉아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척추를 숨쉬기 편한 자세로 편다. 목은 정면보다는 살짝 아래를 향하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생각이 들어오면 흘려보낸다. 모든 사고는 내 호흡에 집중한다. 생각을 단순화하려고 가끔은 서핑할 때 보던 파도를 생각하기도 한다. 들어왔다가 나가는 과정의 무한 반복인 파도, 그 속에서 많은 변화가 있는 바다를 생각하며 호흡에 집중하면 어느새 잡생각들이 사라지고 명상하는 나만 남아 있다.
서핑의 테이크 오프가 일어나기라는 당연한 동작에 대한 고찰이라면, 명상은 숨쉬기에 대한 고찰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너무나도 당연히 해왔던 호흡이지만, 막상 호흡에 집중하여 들숨과 날숨을 구분하기 시작하면 생각보다 어렵다. 언제 얼마나 들이마셔야 하지? 얼마나 참아야 하는지, 내뱉는 건 이정도면 되는 건가? 호흡을 하나하나 구분해가며 진행하다 보면 어느새 가쁜 숨을 내쉰다. 하지만 마치 서핑의 테이크 오프 과정처럼 호흡은 자연스러워지고 생각이 호흡에서 멀어져 ‘무아'의 상태가 되면 파도 위에서 자연스레 이끌어 가던 것처럼 난 자연스러운 하나의 존재가 된다.
서핑의 첫 테이크 오프, 명상의 첫 무아의 순간은 왜 의미 있는 ‘처음'일까?
첫 서핑을 위해 동해를 찾았던 그날, 명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아침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바닥에 가부좌하고 앉았던 그날은 혼자 감당해야 하지만 버거웠던 짐이 있었던 시간이었다. 돌파구가 필요했고 그렇게 찾은 것이 서핑이었고 명상이었다. 나에게 필요했기에 단순한 처음이 될 수 있었던 순간들이 의미가 있는 ‘처음'이 될 수 있었다. 일어난다라는 단순한 동작에 성공하기 위해 답답한 생각들을 치울 수 있었고, 호흡한다라는 삶에 필수적인 행위에 집중하기 위해 힘든 걱정들을 잠시 묻어둘 수 있었다. 그렇게 걱정과 혼란에 먹혀 더 큰 걱정과 혼란을 만들어내던 순간 잠시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면서 만든 테이크오프나 짧은 무아지경 같은 작은 성공의 순간들은 작지만, 성취감을 주었고 현실로 돌아가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주었다.
살면서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서핑하면서 처음으로 보드 위에 일어났을 때, 그리고 해변을 향해 미끄러져 갔던 그 순간입니다.저는 그즈음 너무도 힘든 시기였고, 그 힘듦에 파묻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보드 위에 일어나고 미끄러지던 그 순간, 내 주변에 보이던 거센 파도와 대비되는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느낌은 지금까지 해왔던 걱정과는 상관없이 내 삶은 잘 흘러갈 거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다시 서울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