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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욱 Mar 29. 2023

위스키는 처음

취미를 통해 찾는 자신의 존재

  스코틀랜드 위스키 증류소 여행을 떠났던 친구들과 다시 모여 그때 사 왔던 증류소 독점 판매 위스키들을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위스키들을 나누어 마시며 8,000킬로 미터 저편에서의 추억을 이야기하자 잠시나마 다시 스코틀랜드로 가 있는 기분이 든다.

 

  나에게 위스키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처음 기억은 잔디밭이 펼쳐진 펜션에서 친구가 준 연기 맛이 가득한 양주였다. 맛 구분도 하지 못했지만,  친구가 준 독하고 특이한 향이 나는 술을 마실 수 있어야 멋지다고 생각했다. 입으로는 “마실만하네!?”라고 말하며 마음속으로는 힘들어했었던 기억이 있다. 지나고 나서 그 술의 이름이 아드벡이고, 화학 약품 같던 연기 냄새는 피트라는 것임을 알았다. 


  양주를 위스키라고 부르기 시작한 순간은 글렌알라키라는 위스키를 알게 되면서였다. 위스키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들어가게 되었던 위스키 동호회 첫 모임은 각자 자기의 위스키 한 병을 가져오는 미션이 있었다. 위스키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위스키를 처음 소개해준, 아드벡을 먹였던 친구에게 추천을 부탁했고, 그 친구는 글렌알라키라는 그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증류소의 위스키를 추천했다. 이유는 새롭게 변화를 시도하는 도시 같은 느낌이 나랑 잘 어울린다고 했던가.


  몇 개월 뒤 글렌알라키 제품 9종을 테이스팅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글렌알라키 12, 15, 18을 일단 비교 시음 해본 뒤 눈을 감고 맞춰보는 게임을 했었다. 그리고 모든 제품을 다 맞추지 못하는 창피를 당하고 나서 오기가 생긴 것일까? 위스키들을 사 모으고 집에서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가 시작이었다. 그렇게 위스키를 처음 접하고 2년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위스키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취미가 되고, 위스키는 나에게 또 하나의 ‘처음'을 만들어주었다.


  2년여의 시간 동안 높은 도수에 혀가 익숙해지면서 위스키의 향과 맛에 중독되어 갔다. 좋아하는 향과 맛을 계속 알아가면서 나에 대해 알아가기도 했다.  취미가 생기면 공부하며 접근하는 스타일이라 꽤 다양한 지식이 쌓였고 그중에는 삶이 흘러갈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의미 있는 내용들도 많았다.

위스키가 ‘처음'이 될 수 있었던 의미를 갖게 된 내용들이다. 

 

노력이 결과를 보장하진 않는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뒤 유럽인들은 미국 동부에 상륙하여 미국 토종 포도로 와인을 담아본다. 하지만 와인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 유럽 품종을 도입했지만 잘 자라지 못하자 서로 접붙이기를 통해 품종 개량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묘목들이 교환되다가 미국종 포도의 뿌리에서 기생하던 벌레가 유럽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 벌레의 이름이 필록세라이다. 1860년대 필록세라로 인해 유럽의 기존 포도나무들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본다. 당연히 와인은 필록세라 이전과 이후로 크게 바뀐다.

  기존 유럽 포도 품종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았기에 순수 품종들은 유럽에 존재하지 않고, 이전에 이 품종들을 수입해 갔던 칠레에만 해당 품종들이 남아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 퍼진 필렉세라로 인해 사람들이 스페인으로 이주하여 와인을 만드는데 이것이 리오하 와인의 시작이다. 포도 농사가 불가능해지자 유럽의 와인 메이커들이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아르헨티나 등으로 이주하면서 신세계 와인산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프랑스 명산지의 와인이 귀해지자 원산지를 속이는 일들이 팽배해졌고, 이를 해결하고자 원산지 명칭 제도(AOC)가 생겨난다.


  필록세라의 진정한 영향은 와인뿐만 아니라 세계 주류 역사 전체를 흔들어버린 것에 있다.  와인이 부족해지자 천대받던 맥주의 필요성이 증대하고 병맥주가 개발된다. 와인이 없자 와인 증류주인 코냑을 비롯한 브랜디가 품귀현상이 나타나고, 스코틀랜드의 토속 술이던 위스키가 유럽에 퍼지면서 세계 무대에 데뷔한다. 또한 이런 전염병이나 벌레가 이동하는 현상을 막기 위해 검역제도가 자리 잡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품종 개량을 위한 노력은 생각하지 못한 작은 병충해로 인해 이전 와인 세계가 괴멸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삶 속에서 악의가 없었던 잘되고자 했던 행위들에게도 배신당하는 경우가 많을 수 있다. 그때마다 좌절하고 실망하기에는 필록세라 이후 리호아 와인이 탄생하고, 검역제도가 만들어지고, 위스키라는 위대한 문화를 전 세계 사람들이 접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은 새로운 변화와 발전이 있을 수 있기에 너무 이른 포기이다. 

 

위기는 기회

  1919년 미국은 수정헌법 18조로 금주를 헌법에 넣어버리는 결정을 한다. 술이라는 인류 역사와 함께한 문화를 왜 법적으로 금지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 독일계 이민자 견제, 마피아 배후설 등이 이야기되지만, 영국인 여행자였던 프레데릭 마얏이 저서 『A Diary in America』에서 "미국인들은 술 한 잔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다. 누군가를 만나면, 술을 마셔야 한다. 헤어지면, 마셔야 한다. 당신이 누군가와 친분을 맺으면, 마셔야 한다. 당신이 거래를 끝내면, 마셔야 한다. 만약 싸우게 되면, 마셔야 한다. 화해하게 되면, 마셔야 한다. 날씨가 더우면, 마신다. 날씨가 추워도, 마신다. 선거에 성공하면, 마시면서 기뻐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시면서 욕을 한다. 그들은 아침 일찍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밤늦게 떠난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시기 시작하고, 곧 무덤에 갈 때까지 마신다."라고 묘사한 것을 보면, 너무 술에 취해있는 사회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해 본다.

어찌 되었건 이 금주법은 14년 동안 지속되다가 결국 폐지되는데, 거대 국가 미국이 술을 금지하게 되자 세계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특히 엄청난 위스키 소비국이었던 미국이 금주법을 시행하자 미국 내 버번위스키 증류소뿐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증류소들이 줄줄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 된다. 미국의 780여 개 증류소 중 단 12개만 의학적 목적으로 유지되고 나머지는 다 문을 닫는다. 스코틀랜드 역시 수많은 증류소 중 6개만 영업을 유지하고 나머지는 영업을 중지하거나 폐업의 수순을 밟는다. 


  이때 다른 선택을 하는 한 증류소가 있는데, 이 증류소는 이때의 선택으로 몇십 년 후 세계 싱글몰트 판매량 1위라는 타이틀을 유지하는 계기가 된다.

  글렌피딕은 1886년 12월 25일 윌리엄 그랜트가 9명의 자제와 함께 스코틀랜드 더프타운에 세운 증류소이다. 1923년 윌리엄 그랜트가 죽고 손자 윌리엄 그랜트 고든이 증류소를 물려받는다. 

  1920년대 스코틀랜드에서 6개의 증류소만 살아남을 정도로 미국 금주법의 영향을 받는 위기 시대였음에도 고든은 오히려 생산량을 늘리는 결정을 한다. 그는 금주법이라는 금기가 오래갈 수 없는 본성이 있다고 보았고, 이후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위스키 생산량을 늘리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맞아떨어졌고, 금주법 폐지 이후 좋은 위스키가 없는 시대에 양질의 위스키를 제공하면서 부를 축적한다.

  또한 1960년대 다시 위스키 시장이 침체하는 시기가 오자 글렌피딕은 또 다른 선택을 한다. 1960년대 이전은 블렌디드 위스키(여러 원액을 섞는 위스키)만 존재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싱글몰트(한 증류소에서 보리만을 이용해 만든 위스키) 위스키는 너무 개성이 강해 외면받았다. 하지만 시장이 침체되자 글렌피딕은 싱글몰트를 제품으로 내놓기로 한다. 그리고 글렌피딕은 현재까지 세계 싱글몰트 시장 판매량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글렌피딕의 위기 대응에 대한 선택은 과거에도 전례가 있었다. 1898년 스코틀랜드의 블렌디드 위스키 업체였던 패티슨스(Pattison’s)가 도산한다. 여기에 위스키 원액을 납품하던 수많은 증류소가 위기를 맞는데 글렌피딕 역시 그런 회사 중 하나였다. 그들은 이 위기 상황에서 자신들만의 블렌디드 위스키를 만들기로 결심했고, Stand Fast(지금은 Grants)라는 브랜드로 내놓는다. 이 제품은 아직도 글렌피딕의 주요 수입원이다.


  2010년 겨울 폭설로 글렌피딕 증류소 술 창고 지붕이 무너졌을 때도 발휘된다. 오히려 이 위기를 기회 삼아 무너진 창고에서 찾은 오크통들 속 술들을 혼합하여 ‘스노 피닉스'라는 제품을 만들어 출시한 것이다. 이 제품 역시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고 글렌피딕은 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개성을 내보였다.


  개인적으로는 글렌피딕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집에서 마시지는 않지만, 가끔 바에서나 선물로 글렌피딕을 마실 때면, 위기가 왔을 때 오히려 적극적으로 상황을 이용하며 자신들의 영역과 부를 넓혀가는 글렌피딕의 모습을 생각하며 살아가며 맞이하는 많은 위기에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고민해보곤 한다.

 

작은 차이가 만들어 내는 다양한 변주들

  한국에 있는 위스키 증류소인 쓰리 소사이어티(발음도 어렵고 오타도 많이 나서 그냥 삼사회라고 부르곤 한다), 스코틀랜드에서 방문했던 10개의 증류소를 돌고 나서 생각한 것은 어차피 위스키 만드는 과정은 다 비슷하다는 것이다. 모든 증류소는 보리를 갈고, 당화 시키고, 발효까지 거친 후 증류기에서 증류, 오크통에서 숙성 후 잘 블렌딩 하여 병에 담는 과정으로 요약된다. 그나마 과거에는 근처 지역 보리들로 만들었기에 차이가 있었다면, 요즘은 보리 제공업체가 따로 있어서 비슷한 보리들을, 오크통 전문 제조업체마저 비슷해 특별 계약한 업체들 외에는 비슷한 오크통을 쓰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비슷한 공정에 비슷한 재료, 비슷한 마무리를 거친다면 맛도 비슷해야 할 것인데, 증류소마다 위스키 맛은 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다르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어디서 맛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증류소들은 각 공정에서 자신들만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작은 차이를 둔다

당분을 만들어내는 과정인 당화 과정에서 발아되어 갈려있는 보리에 온수를 붓는데 온수를 두 번에 걸쳐 부을 것인지, 세 번에 걸쳐 부을 것인지, 각각의 온도는 어떻게 할 것인지, 심지어 딘스톤 증류소 같은 경우 세 번째 물 공급을 위에서 하는 것이 아닌 아래쪽에서 한다고 한다. 글랜알라키의 경우는 특이하게 물을 네 번에 나누어 공급하기도 한다.


  발효 공정에서는 나무통에서 발효할지 스테인리스 통에서 발효할지라는 차이와 발효 시간을 얼마나 길게 할지에서 위스키 원액 맛의 차이가 생겨난다. 아무래도 오래 발효할수록 위스키 원액에서 무거운 느낌이 든다. 50여 시간을 발효하는 딘스톤이나 벤네비스에서부터 160여 시간을 발효하는 글렌알라키까지 증류소들은 각자의 개성을 위해 발효 시간에서 차이를 준다.


  오크통에 들어가기 전 가장 큰 차이는 아무래도 증류기에서 나온다. 3번 증류하는 아일랜드나 로우랜드는 가볍고 깨끗한 느낌의 위스키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아무래도 개성이 줄어드는 면도 있다. 로우랜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스코틀랜드 지역은 2번 증류를 하는데 이때 증류기의 모양에 따라 위스키 원액의 캐릭터가 매우 달라진다. 스코틀랜드에서 쓰는 단식 증류기는 구리로 만들어졌다. 구리와 증류된 위스키 원액이 접촉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환류 작용이 길수록) 위스키는 과일 같은 느낌, 가벼운 스타일을 갖게 된다. 


  이러한 특징들을 원하는 증류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기화된 원액이 구리 증류기 안에서 많이 유지되도록 한다. 기본적으로는 증류기 몸통의 모양을 바꾸는 방법이 있지만 이외에도 다양한 고려 대상이 있다.

  예를 들어 글렌모렌지의 경우 증류기 목의 길이를 길게 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약 7미터에 달하는 기다란 목을 가진 덕분에 글렌모렌지의 캐릭터는 기린이다. 

  꿀의 풍미를 갖고 싶은 증류소는 반대가 되어야 한다. 증류된 위스키 원액에는 황 성분이 들어있게 되는데, 황 성분은 꿀의 풍미와 함께 움직인다. 하지만 구리에 닿으면 황 성분은 구리에 흡수되어 꿀의 풍미 역시 줄어든다. 그래서 꿀의 풍미를 갖고 싶은 증류소들은 구리 증류기 안에서 빠르게 밖으로 배출되게 증류기를 설계한다. 대표적으로 달위니가 여기에 속한다.


  증류기에서 기화된 원액이 배출되는 목 부분의 기울기에 따라 환류 작용의 시간도 달라지므로 이것도 고려 대상이다. 기울기가 위로 향해 있으면 환류 작용이 많이 일어나 가볍게 되고 아래로 내려가면 환류작용이 적어 묵직하고 오일리 해진다. 후자의 경우가 맥캘란 증류소이다.


  오크통 숙성 역시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좋은 오크통을 가져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고, 오크통 숙성 창고의 구조, 오크통 숙성 위치, 기온 등 많은 변화를 줄 수 있다.


  같은 공정 속에서 작은 변화를 줌으로써 최종적으로 손에 들어오는 결과는 많은 차이가 발생한다. 이미 누군가가 해왔기 때문에, 조금 귀찮기 때문에, 조금 더 비용이 들기 때문에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정해진 결과만 만들어낸다. 그 속에서 작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수많은 변주가 가능해지는 위스키처럼, 나의 삶 역시 순간순간 만들어내는 작은 변화로 인해 다채로워질 것이다. 

 

규칙에 휘둘리지 말자

  디아지오에서 조니워커 위스키의 마케팅을 총괄하던 존 글레이저(John Glaser)는 스카치위스키 업계가 너무 굳어 있다고 생각했다. 위스키 시장이 커지고 역사가 오래되면서 지켜야 할 규정이 너무 많아지고 그 틀에 갇혀서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자신의 집 부엌에서 컴파스박스 회사 사업을 시작한 존 글레이저는 스코틀랜드 위스키 협회의 규칙들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만의 철학, 위스키의 ‘맛'에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협회와 마찰도 많았고 경고도 많이 받는다. 그래도 그는 꾸준히 자기 철학을 유지해 왔고, 위스키 계의 반항아라는 별명도 생긴다.


  컴파스박스에는 스파이스트리(Spice Tree)라는 제품이 있다. 위스키의 맛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것은 숙성을 위한 오크통이다. 글레이저는 오크통 숙성 중  두 개의 오크통 맛을 함께 뽑아내고자 했다. 그래서 오크통 내에  다른 오크 조각들을 집어넣어 만든 스파이스 트리 제품을 내놓는다. 하지만 오크통 내에 첨가물이 들어가는 것은 스코틀랜드 위스키 협회의 규제상 어긋났고, 그럴 경우 스카치위스키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제재를 당한 존 글레이저는 우회 방법을 생각해 낸다. 오크통 내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될 것이므로 오크통의 뚜껑을 다른 오크 재질로 바꾸어서 두 개의 오크통 맛을 내게 한 것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는 오크통의 나무살 하나하나를 다른 재질로 바꾸는 제품 역시 만드는데, 지금은 단종된 오크 크로스(Oak Cross)이다.


  스카치위스키 협회의 규칙에는 하나의 위스키가 여러 위스키를 혼합해서 만들 경우 들어간 위스키 중 가장 숙성 연도가 낮은 연도로 표시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예를 들어 100년, 50년, 10년을 섞었을 경우 그 제품은 10년 숙성 제품으로 출시해야 한다. 글레이저는 이 규칙 역시 새로운 시도를 막는 제한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수십 년 숙성 원액을 혼합한 제품에 3년 숙성 원액을 0.4%만 집어넣고 컴파스박스 3년 디럭스라는 고급 제품을 내놓는다. 이 제품의 라벨에 있는 크고 화려한 3이란 글자에서 규칙에 사로 잡혀  혁신을 내놓지 못하는 스카치위스키 협회를 비꼬는 그의 마음이 엿보인다.

 

  물론 규칙, 제도, 법은 중요하다. 그들이 있기에 사회가 혼란에 빠지지 않고 안정을 이루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미리 줄여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규제는 문제 발생을 줄이고, 문제가 발생했을 시에 갈등 상황을 피하며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지, 규제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안 된다. 규제를 지키기 위해 어떤 행위들이 생겨나 진정한 목적을 이루기가 어려워진다면 그것은 선후가 바뀐 것이다.

 

  위스키의 ‘맛'이라는 진정한 목적을 위해 스코틀랜드 위스키 협회의 규제에 묶이지 않고 반항아처럼 제품을 만들어내는 컴파스 박스를 보며,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제한에 휘둘리지 말고 진정한 목적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해 본다.

 

취미를 통해 찾는 나 자신

  취미는 단순하게 재미라는 목적을 위해 하는 것이지만, 취미를 즐기면서 나 자신을 찾아가기도 한다.

난 내가 강렬하고 풍미가 가득한 위스키를 좋아하고 커피 역시 다크한 묵직한 타입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년여 동안 위스키에 취미를 붙여 다양하게 마시면서 가벼운 스피릿, 프루티한 느낌의 버번캐 취향이라는 걸 알게 되고, 제주도 여행에서 들렸던 카페에서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커피도 워시드 커피보단 와인 산미가 느껴지는 가벼운 느낌의 내추럴 발효 커피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후, 나 자신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지인들에게 '난 진중한 사람이야'라고 농담했던 것과 반대로 난 가벼운 느낌의 사람이었던 것처럼, 난 커피도 위스키도 가볍고 산뜻하고 향긋한 종류를 좋아했던 것 같다.

 

  어쩌면 알고는 있었을 것 같다. 살아온 삶 자체가 즐겁고 가벼운 방향으로 살아왔는데, 취향이 무거울 리가 있을까. 다만 알고 있는 것을 삶에 녹여내지는 못했던 것이었는데, 몇몇 취미를 통해 이제는 삶에 녹여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삶이 아닐까. 위스키라는 취미가 있었기에 하나의 나로 굳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취하고자 마시는 술에서 너무 많은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실소도 나오지만, 한 잔 위스키를 즐기는 시간 동안 찾을 수 있는 많은 의미들은 위스키가 나에게 또 하나의 ‘처음'의 순간임을 알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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