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 정신과 창조 대한 이야기
노마드(Nomad)는 조금 특별한 위스키이다.
우선 만든 이는 달모어의 마스터 디스틸러이자 "헬로우 하우아유"를 외치며 위스키를 던지는 영상으로 유명한 '신이 코' 리처드 패터슨이다. 위스키의 향과 맛에 민감한 그 답게 위스키 마시는 법을 설명한 영상에서 "바에서 위스키를 주문했는데 얼음을 가득 채워준다면 바텐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던져버려라!"라며 위스키를 던져버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그의 업적이 뒷받침이 되기에 그의 이런 기행은 가볍지만은 않다. 노마드 위스키는 그 리처드패터슨의 또 하나의 기행이다.
그런데 뭐가 특별하다는 것일까? 우선 가격이 5~7만 원 대로 매우 저렴하다. 가격이 저렴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이 위스키가 싱글몰트가 아닌 블렌디드 위스키이기 때문이다. 리처드가 스코틀랜드의 여러 지역에서 위스키들을 모아 블랜딩 한 위스키이다. 이렇게 블랜딩 된 위스키를 스코틀랜드에서 쉐리 오크통에 3년 이상을 숙성한다. 여기까지는 특별한 것이 없다.
여기서 리처드의 기행이 진행된다. 이 위스키를 스페인으로 보내 자신과 독점계약관계인 셰리 와인 명가 곤잘레스 비야스의 안토니오 플로레스에게 보내 페드로히메네즈 와인이 10년 이상 숙성되었던 오크통에서 1년 이상 추가 숙성 과정을 거친다. 이렇게 숙성을 스페인에서 하게 되면 이점이 몇 가지 있다. 우선 부피 큰 오크통들을 굳이 스코틀랜드로 들여오지 않아도 된다. 또한 더운 지방에서 숙성 과정을 거치면 마치 대만의 카발란 위스키가 저숙성도 맛있듯 짧은 시간에 오랜 숙성을 거친듯한 맛을 뽑아낼 수 있다.
이 과정이 특별할 게 없는 것 같지만, 현행 스코틀랜드 위스키 협회 원칙상 스코틀랜드 밖에서 숙성과정을 거친 위스키는 '스카치위스키'라는 명칭을 붙일 수 없다. 스카치위스키란 명칭 자체가 하나의 브랜딩이 될 수 있음을 생각했을 때, 쉬이 그 이점을 버리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리처드 패터슨은 정말 중요한 것은 '맛'임일 뿐 명칭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래서 노마드에는 스카치위스키가 아닌 '아웃랜드 위스키'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노마드(Nomad)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양을 몰면서 천막을 치고 이곳저곳 다니는 유목민들이다. 목축을 생업으로 하던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은 그들이 키우는 가축들이 먹을 풀과 물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이동한다. 이는 공간적인 이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불모지를 새로운 생성의 땅으로 바꿔 가는 것으로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말한다. 마치 겨우겨우 살기 위해 이동해야만 하는 그들의 삶이 가혹해 보이지만, 이는 정착생활에 익숙한 이들의 관점일 뿐 그들은 이동하며 새로운 것들을 생성해 내는 삶이다. 그들은 '있는 것'들에서 ' 또 다른 새로운 있는 것'으로 나아가는 삶이다. 삶에서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과연 있을까? 현대 생산방식도 다른 것들을 이용해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방식일 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정착민과 유목민의 차이는 있는 것에서 다른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그것이 노마드(nomade, 유목민)이다. 땅에 뿌리내리고 토박이로 살며 정체성과 배타성을 지닌 민족을 이루기보다는, 어떤 정해진 형상이나 법칙에 구애받지 않고 바람이나 구름처럼 이동하며 삶을 정주민적인 고정관념과 위계질서로부터 해방시키는 유목인의 사유이다.
그들의 생활방식은 지식인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거기에서 이라는 노마디즘( nomadism)용어도 태어난다. 노마드가 철학 용어로 쓰이게 된 것은 질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이다. 기존 가치나 철학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찾는 것을 뜻하며 학문적으로는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탐구하는 것을 뜻한다.
리처드패터슨은 노마드를 통해 기존 스카치위스키의 규정을 부정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위스키를 만들어내면서 거기에 노마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노마드의 출현으로 인한 변화를 들뢰즈는 “탈영토화의 형식으로서 탈주”라고 했다. 이런 노마드의 출현은 해묵은 정주민의 삶에 새로운 가치와 법을 도입하는 ‘창조’의 사건이 되어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사막에서 이루어지는 히브리인의 원정, 지중해를 횡단하는 반달 부족의 원정, 스텝을 가로질러 가는 유목민의 원정, 중국인의 원정.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곳은 언제나 탈주선 위에서이다”(들뢰즈).
위스키의 중심은 스코틀랜드이다. 하지만 중심에만 머물면 새로운 변화는 만들어지기 힘들다. 노마드가 탈주선 위에서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내듯, 변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은 중심이 아닌 변방이다. 중심은 거기에 안주하기에 변화를 만들어내기 힘들다. 역사적으로 문명의 중심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그들의 변방이던 그리스로 옮겨갔고, 이는 또 그 변방이던 로마로 넘어간다. 그리스 로마 문명은 그들에게는 변방이던 갈리아 북부 산골짜기로 넘어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명으로 중심이 옮겨가 600여 년간 꽃을 피운다. 하지만 이 역시 다시 중세 유럽에서 변방이던 영국으로 옮겨가고 또 미국으로 옮겨간다. 이렇게 변화는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생겨난다.
스코틀랜드에서 위스키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이견이 있긴 하지만 아일랜드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일랜드는 코페이 연속식 증류기를 먼저 받아들인 스코틀랜드에게 위스키의 중심지란 위치를 빼앗긴다. 지금은 스코틀랜드가 위스키의 중심이지만 미국, 일본을 필두로 대만, 인도, 호주, 이스라엘, 프랑스, 한국(?) 등등 변방의 위스키들이 만들어내는 변화가 심상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스코틀랜드는 컴파스 박스 같은 변화를 시도하는 증류소들을 규정이란 이름으로 규제하고 중심이라는 이름하에 변화를 시도하지 못했다.
리처드 패터슨의 기행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시도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이런 변화의 시도들이 위스키 산업에 많아질수록 나 같은 술쟁이들의 지갑은 가벼워지고 간은 나빠지면서 혀는 즐거워질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