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진욱 Aug 27. 2024

로열살루트 21

나이트캡과 잠, 존재자 되기

쿠바의 관세직원인 페드로 앞에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지닌 여행객이 서있다.

깊은 주름살에 멋들어진 턱수염을 기른 얼굴의 여행객은 페드로가 앞에 있음에도 시가를 꺼내고 있다.

페드로는 애써 그 모습을 무시하며 자신의 할일을 한다.

"가방에 무엇이 들었습니까?"

"의류가방입니다."

옷가지가 들어있다고 보기에는 어깨에 눌린 무게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 

페드로는 여행객에게 동의를 구한 후 가방을 열어 확인한다.

수병의 액체가 들어있는 유리병이 보이고, 유리병에는 '럼'이라는 글자가 쓰여있다.

"아니, 이것은 술이 아닙니까? 왜 의류라고 거짓말했습니까?"

"이 술은 내가 저녁에 잠자기 위해 마시는 나이트캡입니다. 나이트 캡은 모자이니 의류가 맞지 않습니까?"

이 당당한 여행객의 이름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밍웨이가 말장난을 한 나이트캡이란 단어는 잠을 잘 때 쓰는 모자를 칭하는 단어이지만, 잠자기 전에 마시는 한잔의 술을 나이트 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이트캡을 쓴 불면증 있는 스펀지밥

    쓰는 나이트캡이 아닌 마시는 나이트캡의 역사는 수세기 전으로 올라한다. 중세 시대에는 숙면을 취하기 위해 자기 전에 에일, 향신료, 설탕을 섞은 음료를 마셨고, 18~19세기에는 브랜디를, 이후 위스키와 칵테일이 등장하면서 더욱 다양해졌다. 나에게 익숙한 나이트캡은 스카치위스키 한잔이다. 스코틀랜드 여행 때 5시면 모든 마을이 조용해지는 것을 보고 저녁에 무엇을 하나 했더니, 다들 한잔의 나이트캡과 함께 잠이 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물론 나도 나이트캡 한'병'을 했다, 그땐 무려 스프링뱅크였다).


    나이트캡이라는 이유로 자기전 많은 위스키들을 마셔봤지만, 평소 향과 맛이 강한 위스키를 즐기는 것과 달리, 잠자기 전에 너무 강한 개성의 위스키는 오히려 잠에 방해가 되었다. 잠자기 전 가장 좋은 위스키는 어른들이 좋아하는 블렌디드 위스키들이었다(나도 이젠 어른을 넘어선 나이인데..). 특히 난 그중 로열살루트를 좋아한다.

    처음 로열살루트를 알게 된 것은 군대 운전병때이다. 지휘관 운전병이었던 나는 종종 PX에서 술심부름을 했고, 그때마다 그는 로얄살루트를 사곤 했다. 그때 맛은 보지는 못했지만 고급스럽게 도자기에 담긴 술이 동양의 술이 아닌 '양주'였다고는 기억했다. 언젠간 마셔보겠다고 생각했었지만, 10여년 후 내가 위스키에 이렇게 빠져들지는 몰랐다.


    어쩌다 잠을 제대로 못 자게 되면 집중도 되지 않고, 내 정신이 내가 아닌 듯 붕 떠있는 느낌이 든다. 사람은 잠을 자야 하고 그래야 또 하루를 보낼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수면에 대한 욕구는 식욕, 성욕과 함께 인간의 3대 욕구라고 불리기도 한다. 나이트캡은 그래서 필요했을 것이다.

    잠은 단순히 피곤해서 저녁에 자는 것을 넘어선다. 프랑스의 유대계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잠을 단순한 욕구를 넘어  주체 성립에 있어 위한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프랑스로 귀화한 후 발발한 세계 2차 대전에서 포로가 되어 다른 유대인 병사들과 함께 독일 하노보 근처 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시절 만들어졌다. 수용소에서 틈틈이 쓴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레지나스는 존재(그냥 있는 것)에서 존재자(주체로서 존재하는 것)로, 다시 존재자에서 타자로 넘어가는 존재론적 모험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잠은 주체로서 존재자의 생성에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그가 생각했을 때 존재와 존재자는 다른 것이다. 존재는 말 그대로 단순히 '있다(il-y-a)'일뿐 너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객체로서의 존재자가 아직 되지 못한 것이다. 수용소에 갇혀 이름도 얼굴도 직업도 빼앗긴 이들이 단순히 '있다'라고만 말할 수 있는 비인격적 존재 상태인 것을 상상해 보면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사진처럼 그들은 존재는 하지만, 주체로서 있는 것은 아니다.

수용소에서 이들은 존재일뿐 존재자는 아니다

    그렇다면 잠이 어떻게 이렇게 단순히 존재만 하고 있는 이들을 주체로 만들어 존재자가 될 수 있게 한다는 것일까.


    잠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잠에 드는 것에서부터 잠에서 깨어나는 과정까지를 말한다. 우리가 잠이 들면 깨어있을 때의 의식을 점점 잃는다. 그러면서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모든 관계들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만 남게 된다. 의식도 사라졌으니 잠이 든 공간에는 자신의 신체만이 남아 있다. 그렇게 외부가 아닌 내면을 향한다. 정말 순수한 자기 자신이 남는 것이다. 그리고 잠에 깨어나면 신체를 통해 다시 의식이 자리 잡고 자신을 다시 정립한다. 이렇게 잠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고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는 여행의 과정이다. 잠을 통해 자기에게 돌아오며 잠을 통해 '여기에 있음'이 가능해지므로 현재의 순간도 자신의 것이 된다. 잠을 자고 일어날 때, 의식이 돌아오는 그 순간은 온전한 나란 주체가 될 수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잠을 잘 수 있는 자유를 지닌다. 아무도 잠이라는 기초적인 행위를 대신할 수 없다. 레비나스는 먹고 자고 쉬는 주체의 삶의 방식을 '향유'라고 부른다. '향유'가 가능해야 주체는 주체로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가진다. 비인격체로 취급받는 수용소의 사람들 마저도 잠을 잘 자유는 있다. 취침 전까진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존재로 여겨지던 재소자들도 최소한 좁은 공간에서 잠이 들 때만은 수용소란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잠에서 깨어나면 자기 자신으로 새롭게 돌아올 수 있다. 남이 봐주던 봐주지 않던 이 순간은 자기 자신이다. 이 작은 향유로 재소자들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회사에서 일에 치이고, 사람들과의 관계에 치이고, 덥고 습한 날씨에 지쳐 집에 들어온다.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유튜브를 보다가 잠에 들 시간이 되었음을 안다. 하루 종일 너무 많이 마신 카페인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는다. 나란 존재가 이 세상에서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하루 종일 뭘하고 산 것일까. 월급날이 되어야 기분이 좋아지려나. 눈을 감으면 자꾸 다른 생각들이 들어 잠을 쫓아낸다.


    다시 일어나서 올드패션드 글라스에 로열살루트 21을 조금 따라 한 모금 마신다. 나이트캡은 향을 부각시켜주는 글랜캐런 글라스보단 올드패션드 글라스가 더 어울린다. 얼음을 넣을까 고민하다가 우선 마시기로 한다. 

    약간의 스모키함과 달콤함이 어우러지며 코에 들어온다. 사과인듯 배인듯 한 과일향과 약간의 시트러스가귤 같은 느낌을 준다. 바닐라 향도 올라온다. 

    한모금 마시면 달콤함이 과일잼의 느낌이 난다. 향신료 늬앙스 뒤에 다시 스모키함이 찾아온다.

    코에서 나오는 향을 느끼며 잔을 한번 다시 돌리고 향을 맡는다.


    술기운에 잡생각들이 사그라들면서 잠이 오기 시작한다. 이때 한잔 더 마시면 이제 잠을 못자고 술을 마시는 시간이 된다. 눕는다.


    사람들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던 난 잠이 드는 순간 고유한 자신으로 있을 수 있다. 의식이 사라지고 깊게 잠이 들면 난 내 침대를 점유하고 있는 내 신체만이 존재한다. 이 순간은 날 괴롭히던 모든 관계, 심지어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의 관계에서 마저 벗어난다. 이 순간들을 보낸 후 잠이 깨면 다시 맑은 의식을 찾고 나 자신으로 돌아온다. 


    나이트캡이 필요한 이유다.



로열살루트 정보

분류: 블렌디드 스카치위스키

지역: 스코틀랜드

증류소: 스트라스일라(Strathisla) 증류소 등

소유주: 시바스브라더스

역사: 

    - 1949년 시그램의 샘 브롬프먼이 시바스 브라더스 인수

    - 1950년 스트라스 아일라 증류소 인수

    - 1953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 기념으로 로열살루트 21 생산


-

로열살루트 21 테이스팅 노트(출처: 공식홈페이지)

도수: 40도

노즈: 코에는 달콤한 배와 감귤류 과일의 향이 가을꽃의 부드러운 향기와 균형을 이룬다. 바닐라와 드라이 오크의 우아한 조화는 셰리의 미묘한 노트와 스모크의 속삭임으로 가득 차 있다.

팔레트: 오렌지 마멀레이드와 신선한 배의 따뜻한 입안과 향신료와 헤이즐넛의 용감한 폭발이 이어진다. 강렬한 과일 향이 지나간 후에는 부드러운 스모크가 남는다.

피니쉬: 길고 건조하며 약간 매운맛이 있다.

기타 정보: 

    -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 기념으로 1953년부터 생산 시작한 위스키

    - 로열살루트 21은 영국 왕실의 행사 진행 시 쏘는 21발의 축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함

    - 도자기는 처음에는 로열 덜튼(Royal Doulton)에서 만들었고, 지금은 웨이드 세라믹스(Wade Seramics)에서 제작

    - 빨강, 녹색, 남색 도자기 버전이 있는데 이는 여왕의 왕관에 있는 루비, 에메랄드, 사파이어를 의미함

    - 갈색은 1991년 단종, 리미티드로 검은색도 있음

    - 이후 남색은 시그니처 블랜드, 초록색은 블렌디드 몰트, 붉고 투명한 색은 블렌디드 그레인으로 출시하고 있음


이전 02화 바질헤이든 다크라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