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와 공존에 대해
라스베이거스는 누군가에겐 유흥의 천국일 수는 있지만 나 같은 이들에게 큰 매력이 없는 도시이다.
대로보단 대로 옆 골목길을 좋아하고, 세련된 프랜차이즈 카페나 술집보단 작지만 주인의 색이 드러나는 곳을 좋아하며, 에너지가 크지 않아 클럽이나 도박에 큰 흥미가 없기에 라스베이거스의 매력은 내겐 매력이 아니다. 그래도 미국에 왔으니 버번을 사서 마시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고 리쿼샵이 보이면 일단 들어가고 본다.
마침 에어비엔비로 잡은 숙소 근처에 허름한 로컬 리쿼샵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찾았다. 라스베이거스의 메인 스트리트에서 벗어난 허름한 리쿼샵, 주변에 비틀거리는 노숙자들, 매우 힙하게 욕을 하며 서로 우정을 나누는 흑인들이 위협스러웠지만 원래 이런 곳에 보물이 있는 법이다. 몇몇 알고 있는 유명한 버번들이 아닌 모르는 버번이나 라이 위스키를 도전해 보자고 들어갔지만, 바로 그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알았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 창의적이거나 도전적인 사람이 아니다. 처음 보는 버번들 사이에서 무엇도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때 필요한 것은 검색이나 아는 것들 중 모르는 세부 카테고리를 찾는 것이다.
바질헤이든은 괜찮은 라이 위스키를 만든다고 알려져 있기도 했고, 국내에서도 한번 정도 마셔봤는데 좋은 기억이 있었다. 국내에서는 제품 하나만 볼 수 있었는데, 미국의 리쿼샵에 4가지 제품이 줄 서 있는 모습이 제법 매력적이다. 그중 <다크 라이(Dark Rye)>라는 글자가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어두운 호밀이라니? 혹시 글렌모렌지 시그넷이 몰트(보리를 싹 틔운 맥아)를 한번 볶아서 모카커피의 향이 나는 것처럼, 이 제품도 라이(호밀)를 한번 볶아서 쓰는 것일까? 호밀도 볶으면 시그넷처럼 커피 향이 나는 라이 위스키라니 너무 궁금하잖아? 같이간 동료가 탐내는 것 같으니 어서 집어버린다.
아차차, 검색을 해보고 살 것을 그랬나. 숙소에 들어와 검색하고 보니 <다크 라이>는 호밀을 볶아서 검어졌다는 의미가 아닌 라이 위스키에 포트 와인을 섞어서 색이 어두워졌다는 의미였다. 일반적으로 위스키는 셰리 와인이나 포트 와인을 담았던 오크통에 위스키를 부어 숙성시키는 방법을 쓰지 위스키와 와인을 섞어버리지 않는다. 그럼 이것을 위스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라벨을 자세히 보니 라이 위스키에 블렌드(blend)했다고 작게 쓰여있을 뿐 위스키라고 표현해두진 않았다.
검색하다 본 한 리뷰어의 평이 머릿속에 맴돈다. "개똥술"
똘레랑스라는 용어는 한국에는 홍세화 작가의 저서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를 통해 알려진 용어로, 사전적인 의미는 "너그럽게 이해하고 서로 다르다고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 단어로는 관용과 의미가 유사하다.
똘레랑스 정신은 피로 피를 씻어내던 종교 분쟁 속에서 등장했다. 가까이는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좀 더 올라가면 로마의 집정관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Quintus Aurelius Symmachus)의 말에서 그 정신을 찾을 수 있다. 원래 로마는 관대한 종교정책을 펼쳐 여러 종교들이 공존하던 제국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를 국교화하면서 기존 관대한 종교정책이 위협받고, 400여 년간 유지되던 승리의 여신상을 기독교도인 의원들이 '우상'이라는 이유로 철거하자 로마 국교도와 기독교도가 날카롭게 대립한다. 이런 시대상에서 그는 이런 말을 남긴다.
"왜 우리 이교도와 기독교도는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 수 없는가? 우리는 같은 별을 바라보며, 같은 행성 위에 있는 동료 여행자이며, 같은 하늘 아래서 살고 있다. 각 개인들이 궁극적인 진리를 찾기 위해 어떤 길을 걸어가는가가 왜 그리 중요한가? 해답에 이르는 길이 오직 하나이어야 한다고 말하기에는 존재의 수수께끼가 너무 크다."
저녁이 되자 약간 마음이 진정된다. 그래, 바질해이든은 그래도 나름 맛있다고 평해지는 증류소이다. 맛있는 술을 만들고자 하는 여정의 목적지에 이르는 길이 단지 내가 아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괜히 이런 실험을 한 것은 아닐 거야. 맛있는 술이면 그것이 위스키이건 리큐어이건 무슨 문제일까? 포트와인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라이 위스키와 결합되면 어떤 시너지를 만들지 모른다. 심지어 캐네디언 라이위스키까지 섞은 건 자기네들 매쉬빌(곡물 조합)과 다른 향미가 필요했기 때문일 거야.
전문가의 블렌딩을 믿어보고 다시 평가하자고 생각해 보며 RFID 스티커를 뜯지만, 포트와인을 부은 술은 머리가 아플 것이고 위스키가 아니니 위스키를 마시고 싶었던 내가 마실 이유가 있나 싶다는 생각에 망설인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 의견을 주장할 권리를 박해받는다면 함께 싸울 것입니다."라는 말로 똘레랑스를 표현한 볼테르는 종교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상대방, 특히 이슬람이나 가톨릭을 저주에 가깝게 격렬하게 비난할 정도로 상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했을 때 똘레랑스가 인정되는 영역은 계몽주의에 따른 '합리적인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영역에 대해서만일뿐, 종교는 이 영역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톨릭이 탄압받을 때 교황청에 종교적 관용을 요구하기 위해 보낸 칼뱅의 편지는 근대 유럽에서 관용에 관한 논의의 시작이라고도 말해진다. 하지만 제네바에 근거지를 마련한 그는 오히려 불관용의 화신이 된다. '삼위일체'에 대한 회의를 품고 있던 스페인 출신 자유주의 신학자 세르베투스는 칼뱅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그에게 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칼뱅은 그를 단지 이단자로 규정하고 대화를 위해 찾아온 그를 70일간 신문하고 화형에 처한다. 화형에 처해지던 날 아침까지 세르베투스는 칼뱅과의 대화를 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죗값이다. 이 고집불통 불한당아! 불에 타 죽는 저주를 받아라!"
위스키는 다른 첨가물이 들어가면 안 돼!라고만 주장하고 여기에 맞는 것들만 인정한다면 이것도 위스키를 성역화시켜 다른 변화를 인정할 수 없게할 수 있다. 잘못된 확신은 911 같은 테러까지 자행하게 만든다. 좀 더 생각해보니 위스키라고 불리울 수 있는 규정 역시 명확하지 않다. 버번위스키는 캐러멜 색소는 쓰면 안 되고, 오크통은 무조건 새 오크통을 태워서 써야 한다는 강력한 규정을 지키면서 숙성 중에 나무 조각을 추가하는 것은 규제하지 않는다. 그래서 메이커스 마크의 프라이빗 캐스크들은 5가지 나무 조각들을 10개를 골라 후숙성 과정을 거치는 방법으로 개성을 준다. 스코틀랜드 위스키는 캐러멜 색소는 허용하지만 숙성 과정 중에 캐스크에 무엇인가를 추가하면 안 된다. 하지만 그 캐스크가 새 오크통이 아니기에 거기에 무엇이 얼마나 담겨있는지는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아 사실 셰리나 포트 와인 등이 많이 남아서 색이 진하지 않은가라는 의심도 받는다. 글렌알라키나 에드라두어의 10년 숙성 위스키 색은 진간장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코르크를 열고 가볍게 향기를 맡아본다.
어? 괜찮은데?? 상쾌한 풀향이 달콤한 향과 함께 올라온다
잔에 따라서 다시 향기를 맡아본다.
포트와인의 달콤한 향의 근간에 라이 위스키의 풀향기가 섞인다. 마치 단 포도밭 양 옆에서 풍기는 풀냄새를 맡는 기분이다. 바닐라와 건초 냄새가 섞인 일반 라이도 좋지만, 달콤한 풀냄새 역시 색다르고 좋다.
한모금하자 달콤함이 입에 감돈다. 라이 위스키의 날카로움이 달콤함에 파묻히지만 그 속 어딘가 존재한다. 바닐라 향은 가라앉지만 포트와인의 즐거움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마시고 나서는 조금 쓴맛이 돌지만, 크게 거슬리진 않는다.
아니, 이 술 괜찮잖아? 두세 잔 마시기에는 단 맛이 강해 지겨울 수 있겠지만, 한잔은 충분히 날 즐겁게 만들어줄 술이다. 위스키로 인정을 못 받을 수는 있지만 술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생각하면 맛은 나쁘지 않다.
근대시대에 만들어진 똘레랑스는 종교개혁, 프랑스 대혁명등을 거치며 사회 각 계층이 각기 힘을 갖게 되고 서로 공존해야 하는 사회적 상황에서 발생한 개념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이든 자기의 존재성을 강화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충돌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데, 이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큰 이데올로기가 사라지고 각 개인과 작은 단체들의 정체성이 난립하여 서로 대립하고 반복하는 현대사회에서 똘레랑스는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한 필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사실 말이 쉽지 이익이 걸린 집단들 사이에서 공존을 위한 관용은 쉽지 않다. 오히려 똘레랑스는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누리는 특권이나 시혜 같은 것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다른 존재, 즉 타자를 용인은 하되 나의 외부에 두는 것이다.
또한 단순히 각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의 똘레랑스로는 근대사회를 넘어서는 담론으로 부족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진정한 관용은 차이와 다양성( difference)이 단순 공존의 대상으로 각기 존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변화(make difference)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 변화를 위한 자세가 없는 관용은 위에서 말한 시혜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신영복 선생이 서울대에서 진행한 강연에서 관용의 결과인 화(和)는 화(化)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자기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 변화를 꾀할 필요가 있다.
위스키 시장이 커지고 경쟁이 많아지면서 새로운 시도들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 이 시도들을 기존의 위스키들과 어긋난다고 배척한다면 위스키 맛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 포트와인을 좋아하지 않던, 위스키라면 함부로 무엇을 섞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하던, 미국의 버번이나 라이라면 무조건 50도는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던 내가 이 위스키를 받아들여 ‘위스키라고 부르는 세상’이 좀 더 넓어진다면 나도 자기 변화를 통해 관용의 자세를 조금은 갖게 된 것 아닐까?
긴 장수 대학생 시절(난 대학교를 10년 동안 다녔다.), 결혼 준비를 하던 후배가 당시 여자친구였던 현 와이프와 함께 내 반지하방을 찾아와 거친 토로를 하다 와이프를 울려버린 일이 있었다. 그 소재는 양말과 치약을 대하는 태도였다. 아마 이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다. 프랑스 대학 수학능력 평가시험인 바칼로레아에 "참을 수 없는 것은 참아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던데, 저 순간 둘은 사소한 소재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4~5시간을 거친 장시간의 토론과 설득은 아무 해결책도 주지 못했지만, 그들은 결혼했고 자주 다투지만 서로를 지켜주고 의지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바칼로레아의 질문에서 가장 핵심은 '참을 수 없는 것'일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문자 그대로 당연히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저 질문의 답이 존재하려면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참을 수 있는 것이었어야 한다. 그때 필요한 것은 상대가 양말을 함부로 벗는 것이나 치약을 중간부터 짜는 것을, 위스키에 여러 다른 시도를 하는 것을 인정이란 포장으로 무관심이나 방관, 자포자기를 하는 것이 아닌, 상대에 대한 내 자세를 변화시켜 진정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일 것이다.
성소수자, 남과 여, 지역, 직업 계층 등 다양한 혐오가 공존하는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의 변화가 아닐까 생각해 보면서, 어서 한국으로 돌아가 <다크 라이> 한잔을 다시 마셔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라스베이거스를 안 좋아하는 것은 똘레랑스가 부족해서가 아닌, 개인의 취향이다)
바질 헤이든(Basil Hayden) 정보
짐빔 증류소의 소량 생산 버번 컬렉션
첫출시: 1992년
증류업자인 Basil Hayden 경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
매시빌: 놉크릭(Knob Creek)과 동일하며, 이는 1792년 바질 헤이든이 처음 사용한 것과 유사
바질 헤이든 다크라이(Basil Hayden Dark Rye) 테이스팅 노트
색: 루비빛이 감도는 깊고 풍부한 앰버
노즈: 다크 베리와 당밀이 균형을 이루는 오크향
팔레트: 캐러멜, 말린 과일, 오크의 복합적인 블렌드와 스파이스의 뒷향과 둥근 식감
피니쉬: 약간의 단맛과 호밀 향신료가 가미된 말린 과일의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