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붙이기와 세계를 재구성하기
컴파스 박스의 블렌디드 위스키 오차드하우스가 생각나는 날들이 있다. 기분이 우울해서 좀 상큼해지고 싶을 때, 오늘 기분이 좋아서 더 상큼해지고 싶을 때 오차드 하우스 한잔하고 싶다. 마시면 내가 상큼해지는 기분이 든달까? 비타민이 들어있을 리 없는 술이지만 몸과 마음에 좋은 일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오차드하우스는 과수원이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상큼한 과일향이 가득하다. 첫 향에서 느껴지는 청사과와 파인애플이 상큼하다. 처음 열었을 때 알코올이 좀 있긴 하지만 상큼함으로 지워본다. 어쩐지 약간의 연기향 같은 느낌도 있다. 약간의 스모키 함은 마치 조미료처럼 다른 향들을 더 올려준다. 향이 너무 좋아 계속 잔을 돌리며 향을 느끼다 보면 어느새 청사과와 파인애플은 복숭아로 바뀐다. 정말 과수원 그 잡채.
오차드하우스는 향을 맡을 때마다 정말 네이밍과 라벨디자인이 찰떡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일들이 잔뜩 그려져 있는 라벨을 보며 마시면, 마치 그 과일들의 향이 이 위스키에 전부 있을 것만 같다. 실제로 체리를 보며 체리향이 있나 찾으며 위스키 향을 맡으면 실제로 있는 것만 같다. 과일향으로 뭉뚱그려 설명하던 향에서 하나씩 이름을 붙여 찾다 보면 그 향들이 나타난다.
이름을 붙인 다는 것은 이렇게 존재를 만들어 내는 행위이다.
노자의 도덕경 두 번째 줄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이름이 없으매 세상이 시작될 때이고, 이름이 있음이 만물의 모태가 된다. 이름이 없이 뭉뚱그려진 개념들에서 세상이 시작된다면 거기에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존재가 된다.
성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하느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아담에게 생물들의 이름을 붙이게 한다.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세기 2:19)
생물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인간은 생물을 인지할 수 있고, 그것은 세계 속 존재가 된다.
위스키 잔을 손에 들고 잠시 스월링을 해본다. 알코올을 날리기 위해 한번 훅~ 불어준 후 입을 살짝 열고 코로 향을 맡는다. 위스키를 마실 때 가장 기다려지는 순간이다. 어디선가 맡아본 향긋함이 느껴진다. 이 향은 내가 어디서 맡아본 무슨 향일까?
사람은 향이건 모양이건 이름을 떠올리지 않으면 그 존재를 구체화시키기가 어렵다. 그래서 자꾸 생각해 본다. 분명 과일인데, 무슨 과일이었지. 사과 같기도 배 같기도 한데, 그러면 서양배가 떠오른다. 출장 갔을 때 아침 뷔페에서 먹어봤던 향이 진했던 서양배는 사과와 배 그 어딘가에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에서 언어를 세계의 '그림'으로 보았다. 언어가 현실을 그리는 방식이 바로 이름 짓기이다. 김수영의 <꽃>에서 화자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꽃이 단순한 자연 속 한 조각에서 벗어나 화자의 세계 안에서 의미를 가지는 존재로 변화한다. 이름은 대상과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창세기>>에서 신의 명령으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일 때, 그것은 단순히 지칭하는 것이 아닌,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일이다.
그런데 사과는 꼭 사과여야 하고, 서양배는 꼭 서양배여야 했을까? 이름과 존재의 관계는 우연일까, 필연일까?라는 질문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까지 올라간다.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인 <크라튈로스>에서는 크라튈로스와 헤르모게네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이에 대해 논쟁한다. 크라튈로스는 이름이 대상의 본질과 자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름이 단순히 임의적으로 정해진 게 아닌 대상을 반영해야 하고, 올바른 이름은 대상을 정확히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헤르모게네스는 이름은 본질과 무관하며 사회적 합의나 관습에 따라서 정해진다고 반박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답게 둘 모두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이름이 대상의 본질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항상 진리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 향을 맡을 때 오차드하우스는 위스키의 특징을 너무 잘 설명해 준다는 생각이 든다. 청사과, 서양배, 레몬, 복숭아, 자두, 파인애플, 청포도, 살구, 스모키 같은 향들이 한편에서 나뭇가지를 태우는 집이 있는 향긋한 과수원의 느낌을 전달해 준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이 향들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느낄까? 누군가는 이 스모키를 나뭇가지를 태우는 느낌 정도로 느끼지 않고 농약을 뿌린듯한 화학약품의 향으로, 또 누군가는 석탄 난로의 향으로 느낄 수도 있다. 누군가는 과일향보다는 달콤한 바닐라 향을 먼저 느낄 수도 있다. 이름은 어쩔 수 없이 언어이므로 언어의 한계를 함께 지닐 수밖에 없고,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것처럼 이름은 실재를 완전히 표현해내지 못한다.
하지만 우린 위스키를 마시며 테이스팅 노트를 적는다.
처음 테이스팅 노트를 적을 때는 그것이 마치 언제나 같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느껴야 한다는 부담을 가졌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말했듯 이름이 대상의 본질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항상 진리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위스키에 이름을 붙이고, 향에 이름을 붙이고, 이를 테이스팅 노트에 쓰는 행위는 위스키를 마시는 실재의 행위 뒤에 다시 실재를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우린 위스키를 마셨지만, 이를 언어로 다시 표현하면서 실재를 새롭게 창조하고 있다. 서로 다르게 느끼더라도 그 맛과 향은 내가 느끼는 실재이며, 그 실재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나의 세계를 재구성하고 더 풍성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
오차드하우스
회사: Compas Box
도수: 46%
숙성년수: NAS
캐스크: 퍼스트필 버번, 올로로소, 프렌치 오크
종류: 블렌디드 몰트 위스키(링크우드/벤리네스/클라이넬리쉬/아벨라워/쿠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