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을 쓰는 이유
오늘은 뭘 쓰지?
12월 초, 어느 늦은 밤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전자책 사이트를 배회하다가 장기하의 산문집 <상관없는 거 아닌가?>를 구매, 다운로드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의 책을 읽고 있으니 더더욱 잠이 오지 않는다. 그의 글로부터 내 생각의 파편들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나도 내 감정, 생각, 생활들을 기록하고 싶단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는데 말이다, 생각만. 바로 실행해 보고자 새벽 6시가 가까워진 시간, 좋아하는 몰스킨 노트를 하나 꺼내 들었다. "매일, 하루에 한 장 글쓰기", 오늘을 시작으로 2021년은 본격 글쓰기의 해로 삼아보겠다며 포부를 밝혀본다.(타향살이에서 생긴 병 중 하나, 사소함에 관계없이 혼자 포부를 밝히고 혼자 꼼지락거리며 하는 일들이 많다) 내 생각의 파편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뭐라도 남아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시작되었다. 매일 쓰기로 했으니깐, 매일 글쓰기장을 펼쳤다. 그러나 매일 쓰기로 했다고, 글감이 자동으로 생기지는 않는 법. 신변잡기적인 하루 일과, 마음에서 올라오는 짜증,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궁금증 같은 것을 떠오르는 대로 무. 작. 정. 채워 넣기 시작했다. 오늘은 뭘 쓰지? 내 하루에 물음표가 하나 더 생겼다.
뭐라도 남겠지.
글쓰기를 시작한 지 20일이 지났다. 글쓰기가 토막토막 난리 블루스. 이런 글쓰기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의미를 꼭 따져야 하나? 쓰기로 했으니깐 1년은 무조건 가보자. 자문자답을 한다. 어떤 글쓰기가 바람직할까에 대한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박상명의 에세이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허지웅 에세이 <살고 싶다는 농담>, 이길보라의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를 읽었다. 그들이 던져주는 글감으로 내 이야기를 써본다. 뭐라도 남겠지 하는 심정으로. 그리고 장강명의 <책, 이게 뭐라고>를 펼쳤다, 2021년의 책과 글쓰기에 대한 내 생각을 짚어보고자. 나는 장강명을 좋아한다. 우선 그와 내가 동갑이라서 괜히 나 홀로 친근하다. 글쓰기를 늦게 시작했다는 것도 호감이다.(물론 그는 나와 다르게 이미 작가로서 매우 훌륭한 분이지만) 남편이 한국이 싫어서 여기서 살아보겠다는 이야길 농담처럼 했는데, 그의 장편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읽으며 '한국에서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면, 떠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라며 남편을 응원할 수 있었다. 장강명은 <책, 이게 뭐라고>에서 흥미롭게도 '말하는 듣는 인간'과 '읽고 쓰는 인간'에 대해 논한다. 재미 삼아 그의 구분에 따르자면, 나는 '말하고 듣는' 쪽에 가까운데, 이에 반해 언제나 '읽고 쓰는' 인간에 대한 동경이 매우 크다. 나는 왜 읽는가, 나는 왜 쓰는 인간에 대해 동경하는가에 대해 새삼스럽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쓰려고 하는가.
다음 정차역은 은유의 <글쓰기의 최전선>. 장기하, 박상영, 허지웅, 이길보라, 장강명, 그리고 은유, 이들을 통해 머릿속에서 막연하게 떠돌고 있던 '글을 쓰고자 하는 나'에 대한 궁금증이 하나하나 선명해지고 연결되고 모아지는 듯하다. 나는 왜 쓰고 싶어 하는가? 내 안의 공허함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어디서 살아도 괜찮을 거라는 자신감에서 시작한 이주민의 삶, 지금 나는 어디쯤에 있을까? 지금 당장 사라져도 아무런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삶, 나는 왜 쓰려고 하는가. 은유는 나에게 새로운 화두를 주었다. '혼자 쓰고 혼자 읽고 혼자 덮는 것은 일기다. 글쓰기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나만 읽는 토막토막 글쓰기, 일기를 써온 것이다. 일기와 글쓰기의 개념이 혼재해 있었다. 일기가 아닌 공적 글쓰기, 글쓰기에 대한 개념이 '은유식'으로 명확해지니 솔직히 글쓰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일단 쓸 것, 써야 쓴다'는 그의 문장이 큰 힘이 되었다.
오롯이 나와 마주하는 시간, '나의 글' 쓰기
나는 유독 김연수의 소설, 에세이를 완독 한 적이 없다, 이유는 책장이 안 넘어가서. 연말이 되면 '소설가들이 뽑은 올해의 소설' 살펴보기를 좋아하는데, 2020년 소설 순위 2위에 김연수의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이 올랐다. 궁금하단 생각만 한가득, 그러다가 김연수의 산문 <소설가의 일>이 눈에 들어왔다. 글쓰기의 관점에서 김연수를 만나기로 작정, 그의 글에 몸을 담갔다. 문장이 엄청(나만 그렇게 느낄 수도) 길어서 집중해서, 맥락을 잘 살펴 따라가야 읽힌다. 어느 순간 단계를 넘어가고 나니, 어... 이 분, 매력 쩌는 분이었어. '원래 소설가는 좀 호들갑스럽다. 왜냐하면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믿으니까'. 이런 사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쏘냐. '소설가에게 필요한 동사는 세 가지다. 쓴다, 생각한다, 다시 쓴다', '일단 써보자, 일단 해보자. 해보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등 그의 문장 하나하나는 공적 글쓰기를 하려는 나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었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나의 질문에, 그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문장, 미문의 인생'으로 응답하였다.
"흔한 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건 너무나 특별한 일이었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일상의 시간이 감사의 시간으로 느껴진다면, 그래서 그 일들을 문장으로 적기 시작한다면 그게 바로 소설의 미문이자, 사랑에 빠진 사람의 문장이 된다.
흔한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흔치 않은 사람이 되자. 미문을 쓰겠다면 먼저 미문의 인생을 살자. 이 말은 평범한 일상에 늘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는 말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미문의 인생이다.
<소설가의 일> 중, 김연수
나에게 아름다운 삶은? 나의 바람은 늘 살아 움직이는 시원한 바람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지금을 사는 것이다. 평범한 하루하루지만 그 안에서 생기가 도는 순간, 빛을 발하는 순간을 알아차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사랑하는 것이다. 글쓰기가 이런 나의 마음과 생각, 나의 하루와 주변을 살피는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롯이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 지금 여기에.
잠이 안 와서, 어쩌다 펼친 장기하의 산문집 <상관없는 거 아닌가?>에서 시작된 '이번' 글쓰기 여행의 종착역은 김영하의 산문 <말하기>이다. 김영하를 애정 하는 나의 마음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생략하겠다. 나에게 큰 울림을 준 부분은 작가-소설, 소설-독자 간의 소통에 대한 것이다. 나는 그동안 글쓰기에 있어 '소통'이라는 막연한 필요성, 즉 인간이란 본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타인과의 소통은 매우 중요하다는 체화되지 않은 관념에 잡혀 있었다. 이를 한방에 날려준 한마디, '소통은 없다'. 나의 글쓰기에 있어, 글 너머의 누군가와 소통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당위감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발레리나가 매일매일 자기 몸에 주목하듯, 아침에 일어나 온몸의 근육을 풀면서 하루를 시작하듯, 나도 그렇게 글쓰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리고 일단 나의 첫 문장을 적는다. '나, 지금 여기에'
작가는 글을 쓰는 것으로써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에요. 반면 독자는 글을 읽음으로써 즐거움을 누리거든요.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엄청나게 다른 거예요. 마치 발레리나와 관객의 관계처럼요. 발레리나에게 관객의 갈채가 있으면 좋겠죠. 그러나 발레리나가 진짜 고민하는 문제는 어떻게 동작을 더 잘할 수 있을까, 이 감정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연기를 얼마나 실감 나게 할 수 있을까, 주로 그런 것들이거든요...(중략)... 관객이 원하는 것과 발레리나가 원하는 것은 달라요. 관객은 그날 하루 가서 즐겁게 관람하기를 바라고, 발레리나는 자기의 인생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면서 더 극복하고 더 진보하고 나아지기를 바라죠.
<말하기> 중, 김영하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또 익숙했다. 대학에서는 노래패 활동을 하면서 대중음악에 대해 토론하고, 한국사회를 분석하고, 공연을 만들어 올렸다. 대학 졸업 후엔 공연기획/문화예술단체에서 일하며 대학원에서 예술경영을 공부했다. 음반기획제작회사를 거쳐 문화예술기획연구소에서 일하며 수많은 기획서/제안서를 쓰고 다양한 지역,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일들을 끊임없이 만들었다. 필요에 의한 글쓰기도 제법 했다.
지금 나의 삶은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나를 표현하는데 한없이 서툰 삶을 살고 있다. 물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단순한 삶을 살고 있다. 서툴고 단순한 삶이지만, 글쓰기를 통해 나의 하루하루에 색다른 생기를 불어넣고 바라보며 더 극복하고 더 진보하고 나아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