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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코 Nov 25. 2024

불면증이 사라지다

난 잠이 많은 타입이 아니다. 눈을 떴는데 해가 중천을 넘어갔더라 라는 이야기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아무리 늦게 잠이 들어도 아침이 되면 눈이 저절로 떠지고, 낮잠도 당연히 잘 수 없다. 피부과나 마사지샵에서 한 시간씩 누워 있어야 할 때 제발 잠이 들고 싶어도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괴로울 때도 많다.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가끔 밤에도 잠을 잘 수 없다는 거였다. 이런 나의 불면증은 당연히 유전이라 믿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우리 엄마도 불면증을 가지고 있기에 내가 불면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놀랍지 않았다. 그런데 밤에 잠을 못 드는 횟수가 잦아지고, 수면의 질이 다음 날 컨디션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는 나이가 될수록 불면증은 나의 삶의 질을 떨어 트리는 큰 요인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야금야금 내 곁에 다가와 점점 존재감을 드러내던 불면증이 어느 순간 치유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감쪽같이 없어진 건 아니지만 그 빈도와 강도는 현저히 줄었다. 


불면증이 사라 진 건 미국에 온 이후부터이다. 

처음엔 시차에 적응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국에 온 지 1년 반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밤에 잠을 못 이룬 것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현저히 줄었다.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회사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가 사라진 것이었다. 

내가 다니던 직장은 꽤 업무 강도가 높고 탑다운의 스트레스가 심하던 곳이었다. 야근도 많았고 업무 시간 이후에 오는 연락도 빈번했다. 항상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는 회사 분위기와 경쟁적이고 저돌적으로 일해야 일을 잘한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구조 때문에 늘 긴장해 있어야 했고,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비슷하겠지만 집에서도 일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기 쉽지 않았다. 그 스트레스가 사라진 것이 맘을 편하게 만들었고 잠을 잘 들게 해주는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 싶다. 


둘째, 햇볕을 보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직장인의 특성상 햇볕을 보는 시간은 점심시간뿐 일 때가 많았다. 그마저도 식사 후 산책하는 10~20분이 전부이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는 싱글하우스에 살다 보니 아침부터 여기저기서 햇볕이 쏟아진다. 그리고 아이 학교 픽업을 가거나 축구 경기를 따라다니면서 야외에서 걷거나 서 있는 일이 무척 많아졌다. 미국의 강렬한 햇볕은 비록 내 얼굴에 주름은 더 늘리겠지만, 나의 수면에는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 조용하고 평화로운 저녁을 맞이한다. 

한국에선 회식도 많고 약속도 많았다. 일이 9시에 끝나도 고기와 술을 마시러 갔고, 2차 3차까지 이어지며 밤을 불태우기 일쑤였다. 물론 아이가 생기고 그 횟수는 현저히 줄었지만 한국에서 밤은 참 길고 맛있고 신나는 것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는 저녁 시간은 99% 우리 가족만의 시간이다. 함께 저녁을 먹고 정리하고, 씻고 잘 준비를 하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빠르면 9시, 늦어도 10시 이전에는 잠잘 준비를 마친다. 가끔 친한 집의 초대로 주말 저녁을 함께 하기도 하고, 남편도 외부 모임을 갖기는 하지만 그 횟수는 한국에 비해서 비교도 안될 만큼 적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이런 조용한 나이트 라이프가 지루하다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8살 아이가 있는 우리 가족에게는 이보다 더 평화롭고 좋을 수 없는 저녁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의 신체 리듬 또한 차분하게 잠을 잘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넷째, 마음이 편하다. 

주변의 시선과 이목에 신경 써야 했던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화장을 안 해도, 옷을 대충 걸쳐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없다. 그게 머가 그리 큰 대수냐 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자유로움이 주는 편안함이 너무 좋다. 매일 아침 멀 입을지 고민하고, 유행하는 아이템을 사서 너무 뒤져 치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이 모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유행보다는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게 먼지 생각하게 되고, 남의 시선보다는 내가 만족하는 걸 우선시하게 되는 지금의 삶이 내 마음을 한결 편하게 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모든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의 불면증을 치료해 준 게 아닐까 싶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불면증이 생길지는 모르겠다. 타고나게 잠을 잘 자는, 소위 머리만 닿으면 잠이 드는 타입은 아니니 아마 약간의 불면증은 평생 숙제처럼 가지고 가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미국에서 누리는 꿀잠을 지금 실컷 누려야겠다. 이 꿀잠만으로도 나의 미국 생활은 꽤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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