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reelike Jun 05. 2021

그녀를 떠나보낸다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가 뜬금없이 그녀의 근황을 묻는다, ‘난 모른다.’라는 짧은 말로 대답했다. 

그녀는 가장 오래된 친구였다. 초등학교 6학년, 전학을 간 학교에 그녀가 있었다. 중학교 졸업 후 추첨으로 배정된 고등학교에서 그녀를 다시 봤다. 70번 버스였나? 그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종점까지 가야 했다. 버스는 자주 오지 않았고 버스정류장에서 우린 자주 마주쳤다. 아침 일찍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친해졌을까? 아니면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막차를 타고 종점까지 오며 친해졌을까? 우리는 3년을 같은 버스를 타고 다녔다. 한때는 친구였던 그녀가 떠오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남편을 따라 외국으로 공부하러 간 그녀와는 인터넷 무료통화도 없는 시절인데도 꾸준히 연락이 닿았다. 국제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계산해도 25년은 넘게 서로 연락했던 친구이다. 카카오톡도 없는 시절이었지만 그녀가 우리나라에 올 때마다 연락했고, 우리는 만났다. 자연스럽게 멀어지기엔 같이 보낸 시간이 많았지만 언젠가부터 연락이 끊겼다. 서로 아이를 키우며 삶을 살아내느라 바빴기에 전화 통화조차 하지 않았다는 걸 몇 년 가까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수소문하여 연락을 했고 한 번의 통화는 했지만, 대화 내용이나 목소리에서 예전 같은 친근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후 그녀와 연락이 끊겼고, 그렇게 흐지부지 끝이었다. 


이유가 뭔지는 모른다. 어쩌면 연락하기 힘든 상황이 생겼을 수도 있겠다. 혹시 아픈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어쩌면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 관계에 대한 실망이 쌓였을 수도 있다. 오래된 친한 친구라면 그 어떤 상황이든, 오해든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 끊어짐이 이해가 안 됐다. 왜일까 생각하며 내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기도 했다. 오해든 상황이든 우리는 그 어긋남의 시간을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렇게 이별은 정리되지 않은 채 내 기억의 서랍 속에 넣어 닫아두었다. 


얼마 전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향수, 화장품, 제품 등에 향을 입히는 일을 하는 정미순 조향사를 본 적이 있다. "어느 날 중후한 병원 원장님이 저를 찾아왔어요. 그 원장님은 첫사랑의 향을 만들고 싶다고 하셨어요. 원장님과 대화를 많이 나누면서 향을 찾아갔어요. 그 향을 만들고 보니 모 회사의 샴푸 향이었더라고요. 향이라는 건 연상 효과가 있어서 그 당시에 있었던 일과 같이 향이 기억돼요." 첫사랑의 향은 독특하고 특별한 향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슈퍼마켓에서 파는 흔한 샴푸 향이었다니…. 실소가 나왔다. 조향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나간 버스를 아쉬워하는 것처럼 지나간 감정을 잡는 것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시작은 감정에서 시작했지만, 감정은 변할 수 있고, 유지하고 싶은 의지가 없다면 끝날 수도 있다.      


"우리는 자주 남을 판단한다. 누구는 선인이고, 누구는 악인이고, 누구는 어리석은 사람, 또 누구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사람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다. 날마다 똑같지 않다. 어리석은 사람이 현명해지고 악한 사람이 선해지며 또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판단한 순간에도 이미 그는 다른 사람이 되고 있다."   -톨스토이 <인생독본 1> 중에서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난 사람을 헤어지기 마련이다. 톨스토이 말처럼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이고 싶다. 흐르지 않고 고인 물은 썩는다. 흘러가는 물처럼 과거에 일어난 일도 흘려보내고 지나간 친구도 보내줘야지. 


과거 친구를 생각하기보다는 지금 여기 있는 친구들과 잘 지내야겠다. 때때로 만나 사사로운 수다를 떠는 친구, 같은 취미를 즐기는 친구, 가장 편한 평생의 친구가 된 남편, 존재 자체로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는 가족이 있다. 그들과도 여전히 배려와 감사, 갈등과 오해, 이해 사이를 오갈 것이다.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같이, 지금 여기 내 옆에서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과 소소한 재미를 만들고 즐겁게 지내고 싶다. 계속 흐르는 물처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들과도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서 나와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다. 역사 속 인물이나 책 속의 인물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경험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여행 가는 곳의 역사를 공부하고 그 땅에 살았던 인물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그녀가 있다. 지금은 어떤 사람일지 모르지만, 삶의 어느 한때 제일 친했던 친구로 기억할 것이다. 그녀는 과거의 사람이고, 그녀에게 가졌던 여러 가지 감정들을 흘려보낸다. 우리는 이미 많이 변했을 것이다. 같이 있을 때 즐거웠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만약 다시 본다고 해도 웃으며 인사하고 그리고 헤어질 것이다. 우리는 여기까지다. 그녀를 떠나보낸다.           

작가의 이전글 5월 마지막 수요일, 인사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