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 얼간이’의 명 대사가 ‘알 이즈 웰(All is well)'이다. 근심과 걱정, 불안이 밀려 올 때 스스로 가슴을 다독이면서 '다 괜찮다, 걱정할 것 없다'고 달래면 정말로 괜찮아진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세상을 다 속여도 나 자신은 속일 수 없는 게 인간이다. 얄팍한 자기 위로에 불안한 마음이 안정될 리가?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미신이 아니라 대단히 과학적 근거가 있는 방법이다.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면 진화에서 시작해야 한다. 진화에는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수천 년, 수만 년도 진화 앞에서는 찰나에 불과하다. 어떤 생물학적 특성, 예컨대 네 발로 걷다가 두 발로 걷는 식의 변화에는 수십 수백만 년이 걸린다. 인간의 인식으로는 가늠이 되지 않는, 상상이 필요한 단위다.
내가 항상 불안감을 느끼는 데에는 진화적 이유가 있었다. 인류가 문명 생활을 시작한 건 길게 잡아도 만 년 남짓이다. 그 전까지 아주 오랫동안 인류는 들판에서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았다. 그 시간 속에서 진화된 우리의 몸과 마음은, 지금도 그 때의 생활에 최적화되어 있다. 진화는 더디기 때문이다.
불안은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심리적 기제였다. 언제, 어디서 야생 동물이나 다른 집단의 습격을 받을지 모르기에 재빨리 위험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불안의 안테나를 켜 두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다. 교감신경-아드레날린-연수로 이어지는 이른바 'SAM계' 호르몬 체계도 이러한 적응적 진화의 산물이다.
문명 생활을 하는 인류는 더 이상 등 뒤에서 달려드는 사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간혹 뉴스에 끔찍한 사건사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구석기 시대의 선조들에 비하면 불의의 습격을 당할 가능성도 크게 낮아졌다. 하지만 몸의 변화는 더디다. 여전히 인류는 불안을 감지하고 이에 대응하는 데에 최적화된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인의 불안 과잉을 낳았다. 사실 그렇게까지 불안해 할 필요는 없는데도, 기왕에 갖춰진 우리 몸의 기제는 불안을 자아내게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자의 위협이 없어도, 생명을 위협하는 당장의 위협이 없어도 막연한 불안감에 떤다. 내일 프레젠테이션의 불안을 호랑이 앞의 불안만큼 키운다. 불안해야 해서 불안한 것이 아니라, 불안하기 위해 불안한 것이다.
그러니 '알 이즈 웰'은 대단히 지혜로운 지침이다. 만약 불안의 정도를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기기가 있다면, 인간은 10 정도로 충분한 대상에 100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러니 '알 이즈 웰'이다. 우리가 불안해하는 것보다 실상은 정말 괜찮은 것이다. 내가 나를 속이는 게 아니라, 나의 호르몬 체계가 나를 속이고 있음을 알아채는 것으로도 마음은 한결 편안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