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다닌 직장을 퇴사하고 휴식기를 보내는 중이었다. 빈둥빈둥 살을 찌워가며 잘 놀고만 있었으면서도 마음이 답답하고 현실이 갑갑해서 혼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이 답답함과 갑갑함을 조금이라도 풀어줄 자극적이고 시원한 기운이 필요했는데 그때 갑자기 떠오른 것이 라멘이었다.
오사카를 처음 갔을 때 많은 관광객들이 먹는다는 라멘집 앞을 지나가는데 고기 육수 특유의 누린내가 심해서 먹을 시도조차 못했었다. 유난히 냄새에 민감한 내가 그래도 일본에 왔는데 라멘 한 그릇은 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열심히 서치를 하고 겨우 찾아낸 라멘집이 하나 있었는데 마침 딱! 그 집 라멘이 떠오른 것이다.
'라멘 먹으러 오사카에 갈까?'
라멘을 떠올리고부터는 걷잡을 수 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백수는 용감했다. 그냥 그 생각 하나로 오사카로 가는 항공권과 숙소만을 예약하고 도망치듯 최소한의 짐만 챙겨 바로 떠났다.
일하는 동안 휴가를 써서 여행을 갈 때는 들뜨는 마음이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백수라서 언제 떠나도, 언제 돌아와도 상관없다는 자유로움이 더 좋을 것 같았는데 그때의 나는 오로지 혼자 떠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비행기에 올라타고부터 별생각 없이 멍하니 내가 날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금세 간사이 공항에 도착했다.
지난 여행의 기억이 살아있던 터라 오사카는 혼자서도 어려움이 없었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시외버스를 혼자 타곤 해서 그런지 어릴 적부터 겁이 없었다. 다만 겁나는 한 가지 사실은 내가 일본어를 아예 못 한다는 점이었는데, 말이 필요할 때는 영어로 써보고 그게 안 통하면 오히려 안 통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 혼자만의 여행이 시작됐다.
라멘 먹으러 오사카에 갈까 생각했던 것만큼 어이없게도 공항에서 오사카 시내로 이동하고 나서 제일 처음으로 들린 곳이 그 라멘집이었다. 몇 년 사이 인기가 많아졌는지 웨이팅 줄이 길게 늘어서있었다. 나는 먹는 것을 위해 웨이팅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날 처음으로 혼자서 웨이팅을 해보았다. 그것도 멀리, 오사카 도톤보리의 중심에서 말이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처음 이 라멘집에 방문했을 때를 회상했다. 프랜차이즈 카페의 관리자로 일을 시작한 지 4년 차 정도 됐을 때였는데 일에 대해 심각한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냄새는 싫지만 라멘은 먹고 싶어서 열심히 검색을 해보고 마음을 정한 라멘집은 협소한 가게인데도 여러 명의 직원들이 으쌰으쌰 즐겁게 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본인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데 다들 프로 같았다. 멋진 그들이 각자의 포지션을 지켜서 만들어 나오는 한 그릇의 라멘. 적당히 쿰쿰한 냄새가 나는 돈코츠의 진한 국물, 라멘의 짠 기운을 깔끔하게 쓸어내려주는 생맥주까지. '참말로 사랑스러운 조합이었지!' 하며 생각하는 찰나 내 차례가 왔다. 나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 집의 메인 메뉴 라멘과 생맥주를 주문했다.
시아와세 라멘. 즉, 행복 라멘.
메뉴가 일본어로만 적혀 있었다면 몰랐을 텐데 관광객이 많은 도시답게 한자와 영어, 한국어로도 표기가 되어있어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무게가 느껴지는 것이 이름부터 마음에 쏙 들었는데 라멘의 맛 또한 그랬다. 돈코츠 라멘. 그 이상의 설명도 필요 없이 이름 그대로, 생긴 그대로의 기본적이고 단순한 맛이었는데 묵직한 것이 진하게 속을 뎁혔다. 속이 조금 따뜻해졌을 때 때깔 좋은 생맥주를 마치 내가 맥주 광고의 모델이라도 된 것처럼 꿀떡꿀떡 마셔주면 그 순간만큼은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나라는 사람은 어떤 방해도 없는 낯선 곳에서 라멘 한 그릇과 생맥주 한 잔에 되는 것이었다. 진력이 나는 현실을 벗어나 잃어버린 행복을 찾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되는 거였다.
그리고 나흘 동안 오사카를 여행했다. 사실 여행이라고는 별달리 한 건 없고 이 동네 저 동네 걸어 다니다가 지치면 어딘가에 들어가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며 멍 때리다가 심심하면 서점을 기웃거리고. 한 거라곤 정말 그게 다였지만 복잡한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 정리가 되지 않으면 될 때까지 여행을 할 참이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정리가 됐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갈 용기가 생긴 마지막 날, 나는 첫날처럼 다시 라멘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행복 라멘 주세요."
아마 여행 마지막 날의 주문은 라멘보다 내가 그 한 그릇으로 찾을 행복을 주문한 걸지도 모르겠다.
"행복 라멘 주세요."
아마 여행 마지막 날의 주문은 라멘보다 내가 그 한 그릇으로 찾을 행복을 주문한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