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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피 Mar 16. 2023

반쪼가리 레드벨벳.

뉴욕 아닌 두바이에서 매그놀리아를 만났다.

누구에게나 인생드라마는 있다. 드라마를 즐겨 보지 않는 나도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를 꽤 많이 찾아보는 편인데 그중 인생드라마로 꼽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미드 <섹스 앤 더 시티>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보면 좋아서 머무르게 되는 장면들이 있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 그 장면은 내게 보통 캐리와 미란다가 바쁜 와중에 만나서 잠시 요기를 하며 어디서든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들이다.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는다거나, 길을 걸으며 아이스크림을 먹는다거나 몇몇 장면 중 특히 좋아하는 장면이 베이커리 집 앞 벤치에 앉아 컵케이크를 먹는 장면이다. 먹는 것보단 먹는 행위 중에 대화가 지속적이라는 점에서 좋았다. 무슨 할 이야기들이 그렇게 많을까? 생각하면서도 시답잖은 것부터 중요한 일까지 모든 걸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좋아 보였던 것 같다. 워낙 어릴 때부터 동성 친구가 없었기 때문일까.

아무튼 그런 장면은 내게 언젠가의 뉴욕 여행을 꿈꾸게 만들었다. 매그놀리아 베이커리를 뉴욕에서만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단순한 판단으로 오직 뉴욕만을 꿈꾸었다.


그리고 두바이를 여행하던 중의 일이다. 어쩐지 좀 호화로운 느낌이 드는 마리나, 주메이라 비치 레지던스를 구경하다가 그 매그놀리아를 만나버린 것이다. 이게 글자인지 기호인지 바로인지 거꾸로인지 모를 아랍어 간판 옆으로 떡하니 뉴욕 시티라고 쓰여있는 매그놀리아를 마음의 준비도 없이 만났을 때의 놀라움과 반가움이란!


이미 바다를 보며 햄버거를 야무지게 먹은 후라 배가 불러 디저트가 딱히 당기진 않았고 그렇다고 내부를 돌아봤는데 그냥 나올 순 없어서 매그놀리아 베이커리의 인기 메뉴인 레드벨벳 컵케이크 하나를 포장해서 나왔다. 이 날 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기 때문에 낮부터 밤까지 레드벨벳은 작은 상자에 포장된 채로 우리 입이 자신을 찾을 때까지 대기 중이었다.


비행기를 타러 가기 전까지 두바이 구경에 박차를 가해 알찬 시간을 보내고 이곳에서의 첫 장소이자 끝 장소인 두바이 공항엘 갔다. 밤 비행기였던지라 공항에서는 면세점도 무엇도 볼 만한 게 없었다. 그 바람에 피로가 몰려왔고 나와 함께 여행을 했던 지인은 앉을 곳을 찾아 돌아다니다 환승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수면의자에 눕거나 앉아서 쉬고 있는 모습이 보여 얼른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열심히 돌아다닌 바람에 허기가 져서 그제야 포장해 온 레드벨벳을 꺼냈다. 한적하고 고요한 공항에서 테이크아웃 커피점도 마침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눈앞에 딱 보여서 아이스커피 두 잔을 사가지고 수면의자에 각자 편하게 자리 잡았다.


드디어 레드벨벳을 개시하는 순간! 우리가 포장해 온 레드벨벳은 컵케이크라 머핀의 형태와 크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달리 포크 같은 것을 챙겨 오지 않았던 게 뒤늦게 떠올라 어떻게 먹지 고민하며 포장 상자를 열었는데 그때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웃음이 터져버렸다. 레드벨벳이 마치 "뭘 고민해. 그냥 먹어."라고 말하듯이 그리고 보란 듯이, 게다가 꽤 정확하게 반쪼가리가 나있던 거였다. 레드벨벳! 이름처럼 멋진 너란 아이!

사이좋게 나눠먹으라고 자체 컷팅까지 시전 해주신 레드벨벳을 한입 베어 물자마자 감동이 밀려왔다. 디저트를 찾아 먹는 사람이 아닌 내 입에도 빨간 맛과 하얀 맛의 조화가 훌륭했다. 기대 없이 주문했던 아이스커피도 진하고 다크한 것이 딱 우리 스타일이었고, 바깥의 습도와 달리 시원하고 달달한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컵케이크 반쪽씩과 커피 한 잔씩을 두고 여행 이야기와 인생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긴 많더라.

내게는 그 장면이 인상 깊게 남아있다. 드라마를 볼 때 캐리와 미란다가 컵케이크를 먹으며 대화하는 장면에 눈이 머물렀던 것처럼, 현실의 내가 누군가와 보냈던 그 시간에 마음이 머물렀다.


나이를 먹을수록 무엇을 어디서 먹는지보다 누구와 어떻게 먹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공항 한 편의 수면의자에 대충 눕듯이 걸터앉아 허기진 배를 채우고 갈증을 해소하며 이야기를 나눴을 뿐인데도 그때가 아직까지 마음속에 깊이 남은 이유도 아마 그래서일 테다.

그날 나와 함께 레드벨벳 반쪽도 나누고 생각과 마음도 나눴던 지인과는 여전히 가장 좋은 벗으로 지내고 있다. 물리적 거리감이 있더라도 정서적 거리감만은 가까운 나의 벗에게 고마운 마음을 보낸다.


두바이 JBR 매그놀리아 베이커리. 해변가에 이렇게나 예쁘게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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