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골 때리는 그녀가 아니라, 골 때리는 것을 보는 그녀다. 축구장만큼 나의 모든 것을 해소해 주는 장소는 아직까지는 없을 정도로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내게는 그 축구장에서 알게 된 절친한 친구가 있는데, 믿을 수 없게도 이 친구와 나는 첫 만남에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었다. 절친이라면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첫 만남이었다니 이것도 골 때린다.
내가 살고 있는 창원으로 원정 경기를 응원하러 온 지인들과 동석하며 이 친구를 처음 만났다. 지인들에게 이름만 듣고 초면이었는데 낯을 가리는 편인지 다른 방향을 보고 앉아서 대화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지인들이 열 마디 할 때 한 마디 할까 말까 하는데 나 때문에 불편해서 그런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서로 잘 가라는 예의상의 인사도 없이 우리의 첫 만남은 끝이 났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 친구가 내 SNS에 팔로우를 요청했다. 내 SNS는 볼 것도 없지만 아무에게나 드러나는 게 싫어서 비공개로 설정해 뒀는데 나의 최측근들이 인정한 친구니까 믿을 만하겠다 생각이 들어 그 요청을 승인했다. 이후 온라인으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늘어났고 만나서 술 한잔 하기도 하며 서서히 친해졌다. 주변인들이 보기엔 우리의 만남이 퍽 신기하다고 하는데 사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던 친구와 지금은 열 마디로도 부족한 사이가 되다니.
친구와는 몇 번 원정 경기를 보러 가는 김에 1박을 하는 축구 여행도 함께했다. 이 친구는 인성만큼이나 혀끝도 믿을만한 미식가인데 내가 따로 알아보지 않고 따라만 다녀도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다 작년 어떤 날에 우리는 울산에서 만났다.
친구는 어딜 가면 항상 몇 군데 후보를 두고 물어보거나 목적지를 알려주며 거기서 바로 만나자고 한다. 나도 미식가 정도는 아니라도 입맛이 까다로워서 아무 식당에나 가진 않는 편이지만 이 친구가 오라고 하면 의심도 하지 않고 그 집으로 간다. 그만큼 지인들 사이에서는 '믿고 먹기도 하는' 사람. 그날도 나는 친구만을 믿고, 갔다. 그렇게 나는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진다는 평양냉면과 난생처음 만났다.
평양냉면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반응이 행주 빤 물 같다, 슴슴하다,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뭐 이 정도여서 기대는 없어도 궁금하긴 한데 선뜻 먹어보진 못한 메뉴였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손범수 역할의 안재홍 배우는 이렇게 말한다.
"뭐지 이거? 하다가 다음 날 갑자기 생각이 나. 그때부터는 빠져나올 수가 없는 거거든. 아마 오늘밤에 자다가 생각이 날 수도 있어요. 아 뭐지 이거? 평냉이 먹고 싶어 막 이런다니까."
이것은 드라마 속 인물처럼 실로도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처음에는 황당할 정도로 당황스러운 맛이지만 지나고 나서 이 밍밍함이 문득 생각날 때가 있을 거라고.
나의 첫 평양냉면!
그 첫 입의 기억을 설명해 보자면 이렇다. 나와 처음 본 날의 친구처럼 내게 등을 보이면서 아무 말없이 있는 듯하며 대화에 참여하는 듯 마는 듯 싱겁게 굴고 있다가, 갑자기 나 이런 사람이라고 무언의 주장을 하듯 '나 이런 냉면이야' 하며 자신을 뽐낸다. 메밀 함량이 높은 평양냉면은 씹을수록 고소한 정도를 넘어 꼬소했다. 육향이 은근하게 나는 육수도 때깔처럼 맑게 목을 넘어갔는데 그 과정에서 향도 맛도 깊어졌다. 꼭 내 친구처럼 말이다.
배불리 먹고 나서 조용히 계산을 하던 친구는 나지막이 "이거 내가 사주는 생일 밥이야. 생일 축하해!" 하는데 정말이지 그마저도 평양냉면 같았다. 사실 이날은 어복쟁반이 메인이었지만 평양냉면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마도 친구의 영향이 아닐까. 아무튼 먹을 거 사주는 사람, 좋은 사람!
주변에서 이런 진국인 사람을 만날 수가 없는데 학교도 회사도 아닌 축구장에서 만나다니. 성실하고 배려 깊고 말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인데 할 말까지 못 하고 사는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축구장에서 만난 첫 번째 동갑내기! 사람 인연이란 참 신기하고 모를 일이다.
친구는 힘들게 일을 하고도 그곳이 어디든 빠짐없이 축구장을 찾았다.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좋아할 줄 아는 꾸준한 마음, 내 친구의 최대 장점이 아닐까. 대단하다고 생각했기에 언젠가 더 좋은 날이 있길 항상 바랐다.
그런데 얼마 전, 축구장에서 우리가 응원하는 팀을 후원하는 모 기업의 자동차를 경품으로 추첨을 했는데 이 친구가 당첨이 된 거다. 중계를 켜놓고 일을 하다가 후반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잠시 화면을 봤는데 친구가 인터뷰를 끝내고 들어가고 있길래 이게 무슨 일이야? 설마? 하며 연락을 했더니 그 설마가 차를 잡았더라. 세상에 이런 일이 있더라.
이건 분명 친구의 꾸준한 마음이 불러들인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어 진심으로 기뻤고, 내 일 이상으로 뭉클했다. 부러움보다는 기쁨. 그때의 그 기분으로 나는 알았다. 이 친구를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나 보다 하고. 내가 이 친구에게 당첨된 자동차만큼 큰 행운은 아니라도 첫 평양냉면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작은 행운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매번 세심하게 나를 챙겨주던 친구에게 이 글을 빌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너는 먹을 거 안 사줘도 충분히 좋은 사람이야!
배불리 먹고 나서 조용히 계산을 하던 친구는 나지막이 "이거 내가 사주는 생일 밥이야. 생일 축하해!" 하는데 정말이지 그마저도 평양냉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