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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피 Jun 13. 2023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에서 배운 것.

치맥보단 초맥이지!

치맥밖에 몰랐던 시절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조합 "맥주엔 역시 치킨이지"라고 말하던 때가.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기 전까진 말이다.


20대의 나는 일본 소설을 즐겨 읽었다. 그때 읽은 소설 중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에쿠니 가오리의 <낙하하는 저녁>인데 나는 이 소설에서 초밥에 맥주, 그러니까 '초맥'을 배웠다.


소설은 연인이었던 사람을 떠나보내고 이별을 받아들이는 한 여성의 과정을 그렸다. 작가 본인의 경험담을 토대로 쓴 소설인 데다 나 역시 이별을 긴 시간 동안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는 중이라 그런지 읽는 동안 감정이입이 많이 됐다.

소설의 첫 부분부터 평소와 다름없이 데이트를 하며 나른한 주말을 보내는 커플이 등장하는데 거기서 내 마음에 먼저 들어온 것은 남자가 담담하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보다 두 사람이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맥주와 초밥을 먹는 장면이었다.


초밥에... 맥주?

이건 대체 무슨 조합이지? 내가 초밥을 좋아하지만 한 번도 그렇게 먹어본 적도, 그렇게 먹어볼 생각을 한 적도 없는데.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딱히 약속도 없고 한가로이 책을 읽고 있다가 소설 속 그 장면에 압도되어 대충 준비를 하고 집 근처 초밥집으로 갔다.


모둠초밥에 맥주 한 병을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곧 먹어볼 맛인데도 얼마나 궁금했는지 모른다. 그런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이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시원한 병맥주와 때깔이 고운 모둠초밥이 빠르게 나왔다.

'이제 나도 좀 먹어볼까!'

초밥 하나를 한 입에 넣고 반쯤 씹다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의 기분을 서술하라면 나는 아주 짧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입 안에서 팡팡! 불꽃놀이가 시작됐다고. 그만큼 초맥은 서서히 퍼지는 신세계였다.

찰진 밥에 두툼한 회 한 점을 올린 초밥은 몇 번만 야물야물 씹으면 알싸하게 고추냉이가 코를 쏘는데 그 정도가 기분 좋게 적당하니 맥주잔을 자꾸 들게 만들었다. 종류대로 12피스가 나오는 모둠초밥 한 접시에 맥주 한 병은 너무 적은 양이었고 그렇게 나는 맥주를 추가 주문했다.


그 시간을 즐기는 동안 생각했다. 음식과 음식의 궁합, 또는 음식과 술의 조합에 대해서 많이들 이야기하는데 그것들 간의 상호작용은 잘 모르겠고 그냥 내가 좋으면 된 거다 하고. 소설 속의 남녀가 서로 싫어하는 초밥을 바꿔먹으며 지내온 것처럼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먹기도, 안 먹기도 하면 그만이라고.


사람의 관계성도 그런 거 아닐까.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저 그렇게. 그때부터 나는 천천히 이별을 이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작은 테이블에 앉아 그런저런 생각을 하던 내 모습을, 시간을 돌이켜보니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에서 배운 것은 초밥에 맥주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내 마음에 먼저 들어온 것은 남자가 담담하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보다 두 사람이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맥주와 초밥을 먹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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