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맥밖에 몰랐던 시절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조합 "맥주엔 역시 치킨이지"라고 말하던 때가.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기 전까진 말이다.
20대의 나는 일본 소설을 즐겨 읽었다. 그때 읽은 소설 중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에쿠니 가오리의 <낙하하는 저녁>인데 나는 이 소설에서 초밥에 맥주, 그러니까 '초맥'을 배웠다.
소설은 연인이었던 사람을 떠나보내고 이별을 받아들이는 한 여성의 과정을 그렸다. 작가 본인의 경험담을 토대로 쓴 소설인 데다 나 역시 이별을 긴 시간 동안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는 중이라 그런지 읽는 동안 감정이입이 많이 됐다.
소설의 첫 부분부터 평소와 다름없이 데이트를 하며 나른한 주말을 보내는 커플이 등장하는데 거기서 내 마음에 먼저 들어온 것은 남자가 담담하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보다 두 사람이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맥주와 초밥을 먹는 장면이었다.
초밥에... 맥주?
이건 대체 무슨 조합이지? 내가 초밥을 좋아하지만 한 번도 그렇게 먹어본 적도, 그렇게 먹어볼 생각을 한 적도 없는데.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딱히 약속도 없고 한가로이 책을 읽고 있다가 소설 속 그 장면에 압도되어 대충 준비를 하고 집 근처 초밥집으로 갔다.
모둠초밥에 맥주 한 병을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곧 먹어볼 맛인데도 얼마나 궁금했는지 모른다. 그런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이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시원한 병맥주와 때깔이 고운 모둠초밥이 빠르게 나왔다.
'이제 나도 좀 먹어볼까!'
초밥 하나를 한 입에 넣고 반쯤 씹다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의 기분을 서술하라면 나는 아주 짧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입 안에서 팡팡! 불꽃놀이가 시작됐다고. 그만큼 초맥은 서서히 퍼지는 신세계였다.
찰진 밥에 두툼한 회 한 점을 올린 초밥은 몇 번만 야물야물 씹으면 알싸하게 고추냉이가 코를 쏘는데 그 정도가 기분 좋게 적당하니 맥주잔을 자꾸 들게 만들었다. 종류대로 12피스가 나오는 모둠초밥 한 접시에 맥주 한 병은 너무 적은 양이었고 그렇게 나는 맥주를 추가 주문했다.
그 시간을 즐기는 동안 생각했다. 음식과 음식의 궁합, 또는 음식과 술의 조합에 대해서 많이들 이야기하는데 그것들 간의 상호작용은 잘 모르겠고 그냥 내가 좋으면 된 거다 하고. 소설 속의 남녀가 서로 싫어하는 초밥을 바꿔먹으며 지내온 것처럼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먹기도, 안 먹기도 하면 그만이라고.
사람의 관계성도 그런 거 아닐까.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저 그렇게. 그때부터 나는 천천히 이별을 이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작은 테이블에 앉아 그런저런 생각을 하던 내 모습을, 시간을 돌이켜보니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에서 배운 것은 초밥에 맥주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내 마음에 먼저 들어온 것은 남자가 담담하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보다 두 사람이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맥주와 초밥을 먹는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