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 광고에 나와 지금까지도 두루 쓰이는 이 유행어를 탄생시킨 마복림 할머니께서 전설로 계셨던 신당동은 떡볶이 골목으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즉석떡볶이를 먹기 위해 신당동을 갔지만 나와 내 친구는 그와 더불어 닭발을 먹기 위해 신당동엘 갔다. 스트레스 해소가 필요한 날이면 항상 점심때가 지난 애매한 시간에 맞춰 가서 떡볶이와 닭발에 낮술을 했는데 그때마다 아무리 애매한 시간이라고 해도 넓디넓은 떡볶이집의 자리는 텅텅 비어있었다. TV 자료화면에서나 보던 사람들로 꽉 찬 떡볶이집은 볼 수 없었다.
우리는 만원도 안 하는 가격에 꽤 많은 양의 닭발이 나오는 떡볶이집의 닭발을 좋아했다. 이렇게나 저렴하고 푸짐하고 맛있는데 왜 사람이 없지? 매번 떡볶이집의 지인처럼 마음이 쓰였다. 그리하여 매번 낮부터 저녁까지 있으면서 푸지게 먹고 나왔다.
암묵적으로 순서는 이랬다. 메인 자리에 둔 떡볶이는 약불을 켠 채 두고 생맥주를 먼저 한 잔씩 들이켰다. 아주 시원하게 목을 축인 뒤에는 닭발부터 공격했다.
뭔가 성의 없게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성의가 넘치는 비주얼이었던 닭발은 보통의 국물 닭발보다는 국물이 자작하게 나왔고 얼큰한 것이 낮부터 술을 부르는 맛이었다. 결국 우리는 "이게 다 닭발 때문이야. 이 맛에는 못 참지." 하며 닭발을 핑계로 (사실은 계획적으로) 소주와 맥주를 주문해서 소맥을 말아 마셨다.
그렇게 생맥주 한잔씩과 일대 일로 말은 소맥을 세 네 잔쯤 비우고 나면 가장 큰 자리를 잡고 있는 떡볶이 냄비가 짜글짜글 끓었다. 신당동의 사실상 주인공인 즉석떡볶이는 분식이라기보다 일단 담는 것부터가 접시가 아닌 냄비인 데다 떡과 어묵, 라면 사리가 들어가 건더기며 국물이며 적당한 비율의 전골 느낌으로 무려 끓이면서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두 번째 술안주로 제격이었다. 그러니까 남들은 1, 2차로 술자리를 하지만 나와 친구는 2차까지 갈 시간이 없기 때문에 한 자리에서 1, 2차를 가버리는 것이었다.
아아 달큼한 서울의 낮이여!
떡볶이 골목이니 떡볶이야 뭐 당연지사고 떡볶이집이 즐비한 신당동 이 골목만의 시그니처가 있다면 아무래도 DJ가 아닐까. 7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 떡볶이 골목은 80년대에 전성기를 맞으며 집집마다 DJ박스가 생겼다고 한다. 영화 <써니>에서 보던 것처럼 사연과 음악을 신청받아 틀어주던 DJ오빠가 있는 떡볶이집들은 당시 이 집 저 집 할 것 없이 인기가 엄청났다고 한다.
나는 DJ 세대는 아니었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그때의 그 바이브를 동경했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7~80년대 음악을 자주 찾아들었다.
친구 따라 강남 아닌 신당을 가서 떡볶이집의 디제이를 처음 본 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무래도 예전만큼의 호응이 없으니 DJ 역시 예전만큼 즐거워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적어도 우리가 방문한 시간에 있던 소수의 사람들에게 DJ박스는 그저 떡볶이집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고 아무런 임팩트가 없어 보였는데, 나에게만은 신기하고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하필이면 DJ에게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나는 나오는 노래마다 이 노래! 저 노래! 하며 반응했고, 다소 나이가 들어 보이는 DJ의 아재 개그에는 빵빵 터져주셨다.
한계 없이 호응하는 나를 보다 못한 친구는
"야 적당히 하라고. 네가 그렇게 반응을 하니까 신이 나셔서 쉬는 시간인데도 저러고 계시잖아." 하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눈짓을 하며
"저분 우리가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즐거워 보이셔.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하고 대답했더니 친구는 가만히 DJ만 쳐다보다가 별말 없이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cheers!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모두를 위해 건배했다. 예전 같지 않은 떡볶이 골목도, 예전 같지 않은 DJ도, 예전 같지 않은 우리도. 예전의 마음만은 잃지 않고 기운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