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커피 Aug 14. 2023

엄마도 이 맛을 낼 수 있었어!

상수동 골목 그 고추장찌개의 맛.

서울에 살 때 자주 가던 골목이 있었다. 상수역 4번 출구에서 약간의 언덕길을 올라가면 나오는 골목이었는데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 골목길에는 작은 맛집들이 줄줄이 이어져있었다. 나는 그 골목을 걷는 것을 좋아했다.

사는 곳은 화양동, 흔히들 아는 건대입구역 근처였지만 동네보다 상수역에서 합정역으로 이어지는 그 길에 가는 곳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내가 자주 찾는 가게는 밥집보다는 커피집이거나 술집인 경우가 태반인데, 그곳은 좋아하는 카페와 술집이 열 손가락쯤은 되는 거리였다.


그중에서도 아는 사람들에게 전도 아닌 전도를 하게 됐을 정도로 푹 빠진 곳이 바로 골목 입구로 들어서면 왼쪽 2층에 있는 작은 술집이었다. 간판도 너무나 작아서 의식하고 보지 않으면 못 볼 정도였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층계가 낮고 좁아서 어디론가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찰나의 모험이 끝나고 문을 열면 어둑한 조명에 나무 테이블이 여러 군데 놓여있는데 돌아보니 밖에서 예상되는 것보다는 넓은 공간이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여기 고추장찌개가 맛있다고 하던데.. 그런데 고추장찌개는 뭐죠..?"

그렇다. 나란 사람은 그때까지 고추장찌개를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함께 갔던 지인은 설명도 필요 없고 믿고 그냥 먹어보라는 대답을 했고, 나는 믿고 그냥 주문을 했다.


술이 먼저 나오고 기본 안주에 한두 잔을 기울이고 있으니 주문한 고추장찌개가 나왔는데.. 맙소사! 비주얼이 완전 내 스타일이었다. 자신의 역할을 할 대로 다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오래된 소형 가스버너 위에 마찬가지로 오래된 양은 냄비가 올라왔다. 냄비 속을 보고 있으니 뭐 특별할 건 없어 보였다.


보글보글 보글보글. 찌개가 끓으면서 나는 소리와 냄새가 침샘을 자극했다. 다 끓여진 고추장찌개를 마침내 처음으로 맛본 순간! 나는 뿅 가버렸다. 이렇게 그냥 빨갛기만 한 국물에 별 건더기도 안 들어가 있는데도 이런 맛이 난다고? 보이는 것처럼 단순함과 동시에 풍부한 맛이었다. 엄마의 찌개 맛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이라 독립 중에 특히 서울 바닥에서는 내 돈 주고 밖에서 찌개를 사 먹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날 고추장찌개를 한 번 더 주문해 먹었고 이후로도 생각이 날 때면 그곳을 찾아갔다. 내겐 그것이 행복이었다.


행복을 주던 고추장찌개와 작별 인사도 없이 나는 서울 집을 정리하고 내려오게 됐다. 가끔 아니 종종 고추장찌개가 먹고 싶었는데 그때마다 예전의 사진으로 견뎠다. 이 지역에서는 고추장찌개 자체를 잘 먹지 않을뿐더러 찾아봤지만 맛있게 하는 곳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일주일에 하루 쉬면서 그 찌개를 먹으러 4시간을 달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내 그리움만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일을 하고 있는데 요즘 유튜브 요리 채널 보는 재미로 살고 있는 엄마가 한 번도 안 해본 찌개를 만들었다는 전화가 왔다. 엄마가 해준 찌개 중에 못 먹어본 찌개가 뭐가 있더라 생각하다가 엄마의 설명을 듣자마자 "고추장찌개에?!!" 외쳤다. 일하면서 퇴근 시간을 기다리거나 하는 편이 아닌데 그날만큼은 퇴근 시간이 기다려졌다. 얼른 집에 가서 고추장찌개에다 소주 마셔야지!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우리 집에서 꽤 오랫동안 묵묵히 제 역할을 하고 있는 뚝배기에다 딱 내 몫만큼 끓여진 엄마표 고추장찌개를 한 숟갈 퍼먹는데... 엄마도 이 맛을 낼 수 있었어! 감동할 지경이었다. 나는 그것에다 밥 한 공기를 뚝딱하고 종일 생각했던 것처럼 소주까지 마시고야 말았다. 생각보다 너무 잘 먹는 나를 보고 엄마는 이후에도 종종 고추장찌개를 끓여주신다.


그래도 내가 처음 맛보았던 그 집 고추장찌개가 그리워서 서울을 가게 되면 꼭 그 집은 들렀다 와야지 생각하고 지냈다. 그런데 얼마 전 서울에서 휴가를 온 지인에게 그 집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골룸이 소중하게 여기던 절대 반지를 잃은 기분으로 굉장한 상실감을 느끼다가 포털사이트에서 사람들의 리뷰를 찾아보니 한동안은 리뷰가 없긴 없었는데 올해 봄쯤부터 다시 리뷰가 몇 개 보였다. 잃지 않았다는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나도 자영업을 시작했지만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자영업 자체나 유지가 힘들어 임대 내놓은 자리를 많이 본다. 커피를 팔면서 우리 건물 사람들이 옆 가게 커피를 사가는 것을 보아도 나는 솔직하게 아무렇지가 않다. 내가 욕심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내 커피나 일에 긍지가 없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주변 어디든 나 때문에 뺏기는 매출도 있을 텐데 그런 것까지 욕심내고 싶지가 않아서다. 모두가 같이 죽자고 하기보단 같이 살자고 하는 일이길 바라기 때문.


그렇게 모두가 좋아하는 맛과 추억을 갖고 있는 집들을 잃는 일이 없는 세상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 만들어지면 정말 좋겠다.



뚝배기에다 딱 내 몫만큼 끓여진 엄마표 고추장찌개를 한 숟갈 퍼먹는데... 엄마도 이 맛을 낼 수 있었어!


이전 22화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