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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피 Oct 17. 2024

책 빌려드립니다

열 평이 조금 안 되는 나의 커피집은 테이블도 몇 개 없을 정도로 작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모여있는 소소한 행복의 공간이다. 건물 안에 있어서 보이는 거라고는 로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뿐이라 바깥이 보이는 여느 카페들처럼 뷰를 자랑하기는 힘든 곳이지만, 나는 나만의 뷰를 만들어 지내고 있다. 좋아하는 영화 포스터를 붙여놓거나 에곤 쉴레의 그림과 알베르 카뮈의 사진 액자를 걸어놓고 입구 옆에 있는 바 자리에는 내 책장에서 골라 온 책들을 모셔두었다. 매장의 특성상 앉아서 드시고 가시는 분들은 많지 않아서 커피를 주문하고 책을 골라 읽는 분들은 거의 안 계시지만 책이 보이면 일단 내 마음이 편하고 책만으로도 인테리어에 한몫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책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기껏 해봤자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며 가만히 서서 보고만 있는 정도랄까. 그런 점은 우리나라 독서율 통계가 거짓은 아닌가 보다 생각하게 했다.


가게 오픈을 하고 시간이 좀 흐르고 하나둘씩 늘어가는 단골손님은 숨겨왔던 관심을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보통은 "사장님 책을 엄청 좋아하시나 봐요." 하는 말부터였다. 그도 그런 게 문이 활짝 열린 곳을 지나가다 보면 주문대 앞에 서서 틈틈이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었고, 책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좁은 공간에 굳이 책을 가져다 놓지도 않을 테니까. 그런 나에게 멋있다며 칭찬해 주시는 손님들을 보면 별것도 아닌데 괜히 쑥스럽기만 했다.


사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별것 아닌 게 아니다.

나도 스무 살이 훨씬 넘어서야 독서의 습관화를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해도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책을 읽어야 다양한 사고가 가능하고, 사고를 해야 말을 할 수 있고 필요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성인이 되고 몇 해가 지나서야 깨달았다. 확실히 습관이 들고 나니 내게 책 읽기란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하는 행동이 되었다. 어딜 가나 내 가방에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간소하게 화장품 같은 것들을 넣어두는 파우치는 없더라도 책 한 권씩은 꼭 들어있었다. 헤르만 헤세가 그러지 않았던가. 독서는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고.


아무튼 김사장의 이런 취미.. 라기보다는 생활화된 습관을 알아보시고 언젠가부터 손님들은 내가 가져다 놓은 책들에 대해 묻거나 이야기했다. 예를 들어,

"사장님 여기 있는 책들 다 읽으신 거예요?"

"이 책 읽어보셨어요? 괜찮아요?"

"여기 있는 거 다 제가 좋아하는 책이에요! 사장님이랑 저랑 취향이 비슷한가 봐요!"

아주 가끔은 저자의 사인본을 보며

"이 작가님이 여기에 오신 거예요? 저 이 분 팬이에요!"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내 책장에서 골라온 책들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내가 쓴 책도 아니면서 오로지 내가 고민해서 고른 책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리고 손님들의 그런 관심은 좀 더 나아갔다.

커피 한잔을 사가시면서 단도직입적으로 책을 빌려가도 되겠냐 물어보는 분도 계시고, 책에 대해 물으시는 분께는 내가 직접 "빌려가셔도 돼요. 천천히 읽고 주세요." 영업하기도 했다. 일주일이 걸리든 한 달이 걸리든 혹은 그 이상이 걸리더라도 그냥 내가 좋아하는 책을 나의 손님도 읽으면 좋겠다는 사심이면서 진심이었다. 좋은 책을 나눌 수 있다는 기쁨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이었다.


며칠 전에 책을 빌려가신 단골손님은 길고양이를 보면 놓치지 않고 먹이를 주는 캣대디다. 다가가기 쉽지 않은 인상이지만 우연히 고양이 이야기로 친근해졌는데 최근에 오셔서 커피를 다 마시고 나가시며 괜히

"이렇게 책을 옆에 끼고 다니면 좀 있어 보이잖아요." 너스레를 놓으시길래

나도 괜히

"꼭 읽으셔야 해요?!" 했더니

"아이 농담입니다! 꼭 읽겠습니다!" 웃으며 인사를 하고 가셨다.


이런 게 바로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재미, 믿음과 정 아닐까.



현재 손님들께서 빌려간 책은 총 일곱 권이다.

양귀자 <모순>

존 윌리엄스 <스토너>

알베르 카뮈 <이방인>

조지 오웰 <동물농장>

박소영 <살리는 일>

무진 <아빠도 세상에 처음인 게 참 많아>

김수미 <너에게도 꽃 같던 초등학생 시절이 있었지>


이 중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벌써 두 분께 대여가 됐고 반납도 이루어졌다. 마침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방금 들어오신 손님은 아메리카노를 한잔 주문하시고 조예은의 <칵테일, 러브, 좀비>를 꺼내어 자릴 잡고 읽고 계신다.


정말이지 오늘도 흐뭇하고 뿌듯해서 마음으로 외친다.

손님! 책 빌려가셔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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