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커피 Oct 17. 2024

"내가 아프대요."

하루는 매장 앞을 지나가던 한 사람이 내게 말을 걸었다. 손에 쥔 작은 텀블러를 보이며

"미안한데 나 따뜻한 물 좀 줄 수 있어요?"


메디컬센터 1층에 자리한 매장이라 병원을 방문하는 사람들 즉 환자분들이 많아서 문이 활짝 열린 가게 안으로 보이는 나에게 약을 먹어야 한다고 물을 좀 줄 수 있냐고 묻는 분들이 꽤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물 드리는 거 그게 뭐라고 미안해하시냐고 흔쾌히 물 한잔을 건네 드린다.


텀블러를 내밀며 다가오신 그분도 커피를 주문하는 손님은 아니었지만 물을 필요로 하시니 웃으면서 "그럼요~" 하고 따뜻한 물을 텀블러 가득 채워드렸다. 그 점에서 내가 친근하게 느껴졌을까.

손님 아닌 손님인 그분은 갑자기 울먹이면서 내게 말했다.


"내가 아프대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네요."


서비스업 종사자로만 십 수년 차인 내게도 이런 손님은 처음이라 어떻게 응대해야 될지를 몰랐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흐느끼듯 어깨를 들썩이던 손님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라고 하신 거예요?"


몸속 어딘가에 나쁜 것이 생겼는데 이런 작은 병원에선 해결할 수가 없으니 큰 병원을 빨리 가보라고 하셨다고 한다. 큰 병원이라는 말만 들어도 얼마나 겁이 날 텐지 당사자가 아니면 모를 일인데 일면식도 없던 분의 말씀에 나까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통상 그런 것이 보이면 일단 큰 병원에 가서 정확한 검사를 받으라고 하니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으실 거예요. 다만 병원은 빨리 예약을 하고 가보세요."


내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이 정도뿐이었다. 그런데 그분은 거짓말처럼 흐느낌을 뚝 그치더니 갑자기 속사포로 당신의 사정을 이야기하셨다. 쇼 미 더 머니가 아닌 쇼 미 더 라이프 뭐 그런 프로그램이라도 찍는 사람인 것처럼 대사 외우듯 쉬지도 않고 말씀하시는데 눈물을 보이며 들썩이던 어깨도 제 자릴 잡았다.


당신의 남편도 아픈 와중에 당신까지 아프면 안 된다며 시작이 된 말은 시간을 거슬러 당신이 시집가던 날까지 올라갔다. 결혼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한 번은 지인을 통해 용하다는 곳에서 점을 봤는데 그때 그 무속인은 이 결혼을 유지할 경우 큰 병을 얻을 수 있다 했다고 한다. 살려면 이혼하라는 말에 대충 건성으로 대답만 하고 나와서는 '이 점집 다시는 오나 봐라.' 속으로 생각하고 잊어버리고 고된 시집살이와 철 안 드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사는 게 다 이런 거겠지 버티며 살아오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무속인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는데 오늘날까지 살아보니 맞는 말이었나 보다 하시면서 당신의 팔자는 당신이 만든 거라고, 내 무덤 내가 판 거라고 가슴을 치며 탓하셨다.

감정이 얼마나 복받치고 답답하면 생전 처음 보는 내 앞에서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니 내 감정마저 힘없이 드러눕는 듯했다. 그래도 그분께는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병원 가셔서 괜찮다는 결과 들으시면 지금 드는 이 생각도 달라지실 거예요. 얼른 병원 가셔서 검사부터 받아보세요. 빠를수록 나을 테니까요."


다시 눈물이 글썽해서는 내게 지지리도 궁상떠는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다고 하시는데 코끝이 찡했다.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 인생 이야기를 하셨던 그분은 내게 갑자기 인사를 하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셨는데 그 뒷모습이 어쩐지 아까보다는 힘차보였다. 어쩌면 그분께 필요한 것은 따뜻한 물이 아니라, 따뜻한 말이었던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