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향수를 간직한 항구 마을에서의 이틀
서른넷의 젊은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묵호역에 내렸다. 남편은 하늘로, 아들은 시부모의 집으로 보내고, 여섯 살이었던 나를 데리고 부모를 찾은 것이다. 흰 털이 벗벗했던 강아지 인형을 끌어안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오빠가 친지에게 불안정하고 때로는 매정한 교육을 받는 동안, 나는 외할머니에게 옛날 노래를 배우며 횟집 일을 따라다녔다. 쏟아질 것만 같은 언덕 집에는 작은 방이 두 칸 있었는데, 외할아버지는 늘 첫 번째 방에 등을 돌리고 앉아 바둑 방송을 보셨다. 나는 다른 한 칸의 방의 나무 벽에 작은 두 다리를 걸쳐놓고 <소양강 처녀>를 불렀다.
그때는 어렸던 데다 묵호에서 지낸 기간도 짧았기 때문에, 동네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 당시의 엄마에 대한 기억도 거의 없는데, 딱 한 가지가 남아있다. 반찬투정을 하다가 잔소리를 듣자, 작은 배낭을 메고 집을 나가버렸던 때의 일이다. 나는 그저 집에서 가까웠던 횟집 거리를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갔을 뿐인데, 엄마는 크게 화를 내며 나를 꾸짖었다. 묵호에 대한 나머지 기억들은,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아니라 모두 어른들에게 전해 들은 슬픈 것들 뿐이다.
삶의 풍파를 만난 가족들은 그렇게 아무 연고도 없었던 곳으로 도망쳐왔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친아버지가 잘 기억나지 않는 나는 그때가 가장 무난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떠올렸을 때 아무 기분도 들지 않아야 평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섯 살의 고집쟁이는 스물아홉이 되었다. 늘 서른넷인 줄만 알았던 얌전한 엄마는, 오십 대 후반의 웃음 많고 목소리가 큰 아주머니가 되었다. 엄마가 우리를 포기하지 않아 줘서 정말 고맙다고, 오빠와 나는 매년 한 번씩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지난 주말, 서른다섯 먹은 남자 친구와 함께 훌쩍 묵호로 떠났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꿈에 나왔다는 이유로 고민 없이 여행지를 정한 것이다. 꿈에서는 여유로운 미소를 띤 외할아버지를 만나 유럽의 어느 항구 도시를 걸었다.
마침 현충일과 강릉 단오제가 있던 주말이라, 우리는 편도 5시간 반이 걸리는 무궁화호를 탈 수밖에 없었다. 어디에서나 잠을 잘 자는 나는 네 시간 동안 숙면했고, 건너편 좌석에서 아이 셋을 둔 부부가 싸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묵호역에 도착할 때까지 정차한 곳들 중 몇 군데는 낯이 익었다. 이내 마주친 창 밖의 푸른빛 바다와 하늘. 모두 창 밖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점심시간 즈음 도착한 묵호역은 아담스럽고 조용했다. 역에서 항으로 걷는 동안, 외할머니가 나에게 분홍색 옷들을 사 입혔던 명동 의류점이 아직도 운영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적어도 20년 동안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근처 구제의류 가게의 쇼윈도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행인들을 구경하는 웃긴 개들도 보았다.
막 개인 날의 항구 마을. 선착장에는 명조체의 이름이 새겨진 고기잡이 배들이 빼곡히 모여 넘실대고 있었고, 항구 너머 산비탈에는 붉고 푸른 지붕을 가진 낮은 집들이 가득했다. 배구공 같은 부표가 달린 만선기 더미와 낚시 그물, 그리고 생선 냄새를 맡으면 낮잠을 자는 노란 고양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항구의 풍경이었던 오징어 말리는 모습은 볼 수 없었으나, 특유의 잔잔하고 비릿한 공기는 그대로였다.
건어물 가게와 낚시용품점이 모여있는 거리를 지나 도착한 수변공원. 계단을 오르자 방파제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감색의 물빛과 잘 어울리는 싱싱한 파도가 계속해서 밀려왔고, 우리는 한동안 걸음을 멈추었다. 해안도로 쪽의 바다는 더 짙고 거칠었다. 난간 앞까지 바짝 달려온 파도는 시커멓고 울퉁불퉁한 바위에 부딪혀 하얀 거품으로 부서졌다. 몇 시간이고 바라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시원한 파도. 내가 너무나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슬슬 배가 고파진 우리는 숭어 한 마리와 오징어 두 마리를 회로 떠서 숙소로 이동했다. 긴 이름을 가진 오래된 호텔. 방은 온통 흰색으로 깨끗했고, 창 밖으로는 망상해수욕장이 살짝 보였다. 평소 즐기지 않는 술도 여행지에서는 달다. 쫄깃한 회를 질릴 때까지 먹고, 낚싯대를 빌린 다음 해변으로 향했다.
아니, 해수욕장에서도 낚시를 하던가. 남자 친구가 낚시 찌를 사러 간 사이,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모래사장에서도 낚시를 하나?” 항구 쪽 방파제로 가도 물고기를 잡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깔깔깔 웃었다. 아빠가 젊었을 때에는 항상 차 안에서 미끼 냄새가 진동했다.
그렇게 우리는 해변에서 해초를 낚아 올리며 즐거운 오후를 보냈다. 남자 친구가 더 노력해보는 동안, 나는 조개껍데기도 모으고 노트에 스케치도 했다. 저녁에는 나의 가장 오랜 친구인 이모양을 만나, 해변의 한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근황을 나누었다. 서로의 옛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친구사이는 내게 정말 귀하다.
이틑날, 우리는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묵호역으로 이동했다. 버스에는 외할머니처럼 곱슬머리를 한 할머니들이 대부분이었다. 창 밖으로 동네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기억이 닿는 곳이 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는 일이 즐거웠다. 우리는 역사 내 물품보관함에 커다란 배낭을 맡겼고, 가벼운 차림으로 논골담길로 향했다.
묵호등대로 올라가는 산비탈 길이 바로 논골담길이다. 골목을 따라 이어지는 담벼락에는 알록달록한 벽화들이 자리 잡았고, 내 기억 속에 사진처럼 박혀 있던 ‘쏟아질 것 같은 집’들은 대부분 카페나 소품점, 숙박 시설로 변했다.
때마침 주말 동안 논골담길 축제가 열렸고, 우리는 골목 입구에서 나누어주는 만선기와 커다란 돌, 스탬프 카드를 들고 등대로 올랐다. 길이가 삼 미터는 족히 돼 보이는 만선기를 어깨에 짊어지고, 한 손에는 아기 머리통 만한 돌을 들고 언덕을 오르는 남자 친구의 모습이 볼만했다. 중간 지점 즈음에서 돌에 그림을 그리고 김을 한 봉지씩 받았고, 등대에 도착해 만선기를 내려놓고 미역을 한 봉지 받았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남자들은 모두 만선기를 하나씩 끌고 올라오고 있었다. 스탬프 카드에 도장을 채우기 위해 논골담길을 샅샅이 둘러본 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쉬기로 했다.
여행지에서 가장 흔하게 기념품으로 구입해오는 것이 엽서가 아닐까. 나는 늘 뒷면이 비어있는 엽서에 애정이 가지 않았다. 우리는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등대에서 얻어 온 엽서를 한 장씩 나누어 갖고, 서로에게 짧은 편지를 썼다.
서울로 떠나는 기차는 오후 다섯 시 이분에 출발 예정이었고, 논골담길에서 내려온 우리는 잠시 수변공원을 거닐며 바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기차역으로 걸어가는 길. 어제 만났던 구제의류 집 개 한 마리가 밖으로 나와, 친히 자신을 쓰다듬게 해 주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정겨웠던 묵호 여행을 마치고 기차에 올랐다. 집에 도착한 나는 난생처음 냉장고에 엽서를 붙여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