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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Nov 20. 2020

미국의 대륙횡단철도 2

경제사를 뒤바꾼 대륙횡단철도 이야기 2

1862년 태평양 철도법(Pacific Railroad Acts of 1862)이 승인되었다.


태평양 철도법(1862)의 시대적 배경


철도를 건설하는 회사에 연방정부의 채권과 철로 주변의 땅을 보조금으로 지급하는 내용이었다.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이전에 제14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피어스(Franklin Pierce, 1804~1869) 시대에 전쟁부 장관인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Finis Davis, 1808~1889)는 동과 서를 잇는 5개 경로의 노선 조사를 진행했었다.


조사 시작 후 2년 뒤(1855년)에 12권의 보고서가 의회에 제출됐다. 하지만 철도의 노선이나 이를 담당할 건설 회사 승인을 하지 못했다.


여러 해 동안 지지부진하다가 1862년에야 보조금 지급에 관한 법안이 통과된 것이다.



1862년 철도법 승인 문서   <출처 : 위키피디아>


이후 1863년, 1864년, 1865년에 걸쳐 법안 내용이 추가되거나 삭제되었다.


막대한 보조금 지급과 철도 회사의 탄생


결과적으로 1862년 철도법을 통해 보조금이 철도 회사에 직접 지급되었다. 그 전의 법안은 각 주정부에 지급이 되었다.


직접 보조금 지급은 철도 회사의 건설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였다. 후에 이 회사의 이익 증가에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연방정부로서는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해야 할 만큼, 국토 개발을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었다.


하지만 쉽사리 사업가들이 달려들지 못했다. 경제적 보상만큼 근본적인 사업 위험성이 컸때문이었다.



1869년 CP(센트럴 퍼시픽 철도) 소속의 기차   <출처 : 위키피디아>


이를 극복하고 대륙횡단철도를 진행한 주요 회사는 2개였다.



CP(센트럴 퍼시픽 철도)의 설립과 빅 포(Big Four) 


가장 먼저 시도한 회사는 1861년 6월에 4명의 캘리포니아 사업인과 정치인이 설립한 ‘센트럴 퍼시픽 철도(Central pacific Railroad, 이하 CP)’였다.


이 회사를 세운 4명의 사업가를 일명 ‘빅 포(Big Four)’라 불렀다.



릴랜드 스탠퍼드 초상   <출처 : 위키피디아>


1861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릴랜드 스탠퍼드(Amasa Leland Stanford, 1824~1893, 스탠퍼드 대학의 창립자), 콜리스 포터 헌팅턴(Collis Potter Huntington, 1821~1900, 기업인. 말년에 정치인 뇌물사건으로 곤욕을 당했다), 마크 홉킨스 주니어(Mark Hopkins Jr, 1813~1878, 철도 경영자), 찰스 크로커(Charles Crocker, 1822~1888, 철도 임원, 금융인)였다.



콜리스 포터 헌팅턴 초상  <출처: 위키피디아>


대륙횡단철도가 완공되었을 때, 빅 포(Big Four)를 포함해 건설 감독관 등 관계자 대부분이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이 빅 포(Big Four) 이외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이가 있었다.


테오도어 유다의 열정


이름은 테오도어 유다(Theodore Dehone Judah, 1825~1863)였고, 엔지니어 출신이었다.



테오도어 유다 초상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185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통과하는 철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결국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미친 유다(크레이지 유다)’로 알려졌고, 수많은 이들이 비웃었다. 실현 불가능 했기 때문이었다.


유다는 포기하지 않았고 1857년 1월 워싱턴에서 "태평양 철도 건설을 위한 실현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투자자는 나서지 않았다.


1860년 실제 측량을 통한 실현 가능한 계획을 세우고 발표 자 분위기는 반전됐다.



유다가 작성한 새크라맨토 스케치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1861년 CP(센트럴 퍼시픽 철도)가 설립되고, 공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예상 이상의 막대한 돈을 필요로 했다. 유다는 공사 자금을 투자받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유다의 죽음과 계속되는 공사


그는 투자를 위해 뉴욕으로 항해하던 중 파나마에서 걸린 질병(황열병)으로 1863년 11월에 사망했다.


'대륙횡단철도(First Transcontinental Railroad)'가 개통되기 이전에 눈을 감은 것이다. 당시 나이가 37세였다.


이후 CP(센트럴 퍼시픽 철도)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가로지르는 철도 노선을 계속 건설해 나갔고,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뒤를 이었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 공사 현장   <출처 : 위키피디아>


가장 큰 어려움은 인력난이었다.


위험하고 힘든 건설 현장에서 하루 이틀 일하고 도망가는 이들이 속출하자, 공사 일정은 지지부진 늘어져 갔다.


당시 백인 노동자들은 같은 급여 대비 농장이나 캘리포니아 광산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했다. 최소한 목숨을 잃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철도 공사 현장 (1869년)  <출처 : 위키피디아>


인력난과 중국인 이민자 채용


회사는 궁여지책으로 미국 서부로 건너온 중국인 이민자들을 채용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작업을 게을리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아무 군소리 없이 고분고분 복종하는 태도에 경영진은 대만족 했다.


이들은 '쿨리(Chinese coolies)'라 불리며 일을 했다.


깜짝 놀랄 정도의 낮은 임금을 받았고, 놀라운 인내력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철도 건설 현장의 중국인 근로자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깎아지른 절벽을 뚫어야 하는 난공사는 대부분 이들의 손에 맡겨졌다.


하나의 줄에 의지해 중국식 바구니에 탄 채 절벽으로 내려가 정을 들고 바위에 구멍을 낸 뒤,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는 업무도 했다.


많은 이들이 폭발의 충격으로 바구니를 연결한 끈이 끊어지거나 바위 파편에 맞아 절벽으로 떨어졌다. 부지기수였다.


중국인 근로자의 희생과 이민금지법(1882)


이들의 희생으로 난공사가 하나하나 진행되어 갔다.



중국인 근로자들   <출처 : 위키피디아>



이곳의 겨울은 끔찍할 정도로 추웠다. 따뜻한 곳에서 이민 온 중국인 노동자들이 숱하게 동상에 걸리거나 얼어 죽었다.


이에 대한 근거 자료가 없을 정도로 관리 감독이 부실했다. 단순 소모품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이들의 희생으로 철도 공사는 진행되었고 결국 완공이 되었다.



공사 현장의 중국인 근로자   <출처 : 위키피디아>


나중에 릴랜드 스탠퍼드(Amasa Leland Stanford)는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내 중국이민자 들이 머물 수 있는 차이나타운 지역을 기부했다.


아울러 자신이 설립한 스탠퍼드 대학에 일정 비율의 중국인 입학을 허용했다.


하지만 연방정부는 공사가 끝난 후, 1875년 페이지법(Page Act of 1875)을 통해 중국 이민자들, 특히 여성 입국을 강하게 제한했다.



중국인 근로자들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이에 더해 1882년 중국인 이민금지법(Chinese Exclusion Act)이 추가 제정되어, 특정 국가의 민족(중국인)이 이민오는 것을 법으로 막았다. 


이 법은 1943년 매그너슨법(Magnuson Act)에 의해 일부 제한이 풀렸고, 1965년이 되어서야 이민국적법(Immigration and Nationality Act of 1965)에 의해 종결되었다.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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