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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Nov 23. 2020

미국의 대륙횡단철도 3

경제사를 뒤바꾼 대륙횡단철도 이야기 3

서부에서 공사를 시작한 철도 회사는 ‘센트럴 퍼시픽 철도(Central pacific Railroad, 이하 CP)’였다.


이와 반대로 동부에서 공사를 시작한 회사는 ‘유니언 퍼시픽 철도(Union Pacific Railroad, 이하 UP)’다. 이 회사는 토마스 C. 듀란트(Thomas Clark Durant, 1820~1885)가 주도적으로 운영했다.



UP(유니언 퍼시픽) 소속 공사장의 회사 간부들  <출처 ; 위키피디아>


연방정부 보조금과 UP(유니언 퍼시픽 철도)


두 철도 회사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철도 건설을 진행해 갔다. 이면에는 경제적 이익이 자리 잡고 있었다.


1862년 승인된 태평양 철도법(Pacific Railroad Acts of 1862)에 해, 건설이 완료된 철도 회사의 보조금은 상상 이상이었다.


평지는 1마일 당 16,000달러의 보조금이 시작했다. 산악 지역을 통과하는 곳은 위험수당을 고려하여 48,000달러를 지급했다.


추가적으로 공사가 완료된 지역은 철도 주변의 땅을 1마일당 25㎢을 주었다(나중에 52㎢로 늘어났다).



공사 현장의 모습(1868년)  <출처 : 위키피디아>


철로가 완공되고 역이 들어서는 지역은 어김없이 건물이 세워지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도시가 세워지면서 주변 상권이 생기고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 이 차익으로 철도회사의 이익은 늘어났다.


상대 회사보다 얼마나 빨리, 더 멀리 철도 공사를 하는 것이 이익 증가와 직결되었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자 공사장은 본격적으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UP(유니언 퍼시픽)의 공사 현장도 서부의 CP(센트럴 퍼시픽)와 다를 바 없었다.


데일 크릭 브리지 건설 현장  <출처 : 위키피디아>


인디언의 습격과 아일랜드 이민자


광활한 산맥만 없다 뿐이지, 원래 이 지역에 살던 인디언들의 습격을 받았던 것이다.


철도 공사로 삶의 터전을 상실하게 된 인디언들은 한밤중에 습격하여 인부를 잔혹하게 살해하거나 공사 현장을 훼손했다.


당시 연방정부의 행정력이 이 곳까지 미치지 못했고, 인부들은 스스로 무장하여 자신을 지켜야 했다.


힘든 노농과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 이들은 하루 이틀 일하고 그만두기 일쑤였다. 결국 빈자리를 채운 사람들은 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들이었다.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도 있었다.


이들에게는 달리 직업 선택이 없었다. 살기 위해 철도 공사 현장에서 일해야 했다.



토마스 C. 듀란트   <출처 : 위키피디아>


토마스 C. 듀란트와 그린빌 닷지


CP(센트럴 퍼시픽)의 사업을 책임진 사람은 토마스 C. 듀란트(Thomas Clark Durant, 1820~1885)였다.


그는 탐욕가로, 욕심이 많았다. 10% 이상 개인이 회사 지분을 가질 수 없었으나, 대리인을 내세운 차명으로 실질적인 회사의 경영권을 갖고 있었다.


그가 임명한 사람이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던 그린빌 닷지(Grenville M. Dodge, 1831~1916) 장군이었다.



그린빌 닷지   <출처 : 위키피디아>


닷지는 이곳의 수석 엔지니어로 임명되었고, 마치 전투를 치르듯 하루하루 목표를 세우고 할당량을 준수해 나갔다.


인디언의 공격에 대비해 별도의 방어 인력고용하고 공사를 독려했다.


강력한 통제 효과로 하루에 1km도 진행되지 못했던 공사가, 1년여 만에 하루 4.8km씩 완공되었다.


1869년 5월 대륙횡단철도의 개통


이윽고 1869년 5월 10일 유타 주 프로몬트리(Promontory)에서 두 회사가 만났다.


CP(센트럴 퍼시픽)와 UP(유니언 퍼시픽)의 근로자들이 서로 마주 보면서 마지막 행사를 서로 진행하겠다고 주장했다.


골든 스파이크를 박는 모습(1881년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일명 골든 스파이크를 박는 행사로, 사실상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장면이었다.


결국 역사의 주인공은 CP(센트럴 퍼시픽) 사의 '빅 포(Big Four)’ 중 한 명인 릴랜드 스탠퍼드(Amasa Leland Stanford, 1824~1893)가 되었다.


대륙횡단철도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미국 경제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었다.



크레디트 모빌리에 스캔들(Crédit Mobilier of America scandal)


크레디트 모빌리에는 UP(유니언 퍼시픽)의 경영자인 토마스 C. 듀란트에 의해 1864년에 설립된 회사였다.


철도회사의 사업적 연결성을 가진 것이 아닌, 횡령을 위한 페이퍼컴퍼니였다.



1869년 철도 시간표와 홍보 내용  <출처 : 위키피디아>


철도회사의 이익을 빼돌리기 위해 설립된 이 회사는 1872년에야 그 전모가 밝혀졌다.


결국 실제 공사가 진행된 비용보다 더 부풀린 청구서가 연방정부에 제출됐고, 차익으로 발생된 이익은 크레디트 모빌리에 주주 배당금으로 지급되었다.


참고로 UP(유니언 퍼시픽)의 주주들이 사실상 크레디트 모빌리에의 주주들이었다.


수많은 정치인이 관련되어 있었고, 의회의 조사까지 받게 되었다.


결국 UP(유니언 퍼시픽)의 이익은 고스란히 크레디트 모빌리에로 이전되었고, 주주들은 돈방석에 앉았다.



철도 개통 홍보문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러한 사기가 가능했던 것은 간접 청구 방식이었다.


공사비를 과대하게 부풀린 청구서를 UP(유니언 퍼시픽)는 그대로 승인했고, 자사의 관리비와 간접비용을 포함시켜 연방정부에 비용 증거로 제출했던 것이다.


연방정부의 감사와 정경유착


연방정부는 UP(유니언 퍼시픽)에 대한 감사에서 별다른 수익 창출의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막대한 보조금이 지급될 수 있었다.


이 스캔들로 벌어들인 금액은 약 4,400만 달러였다.



크레디트 모빌리에 풍자 삽화   <출처 :위키피디아>



공사비가 약 5,000만 달러였고 연방정부에 청구한 금액은 9,400만 달러였다.


이 중에서 약 900백만 달러가 관련 정치인 뇌물과 규제 해제를 위한 로비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나머지 금액은 대부분 배당금 형태로 크레디트 모빌리에 주주들에게 지급되었다.


도금 시대(Gilded Age, 1873년 ~ 1893년)에 발생된 대표적인 정치·경제의 정경유착 사건이었다.


1872년 의회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관련 정치인 9명은 모두 공화당 출신이었다. 법무부 조사 결과, 약 30여 명의 정치인들에게 크레디트 모빌리에 주식이 제공되었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대부분 혐의를 부인했다.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심지어 조사 대상자였던 제임스 가필드(James A. Garfield)는 1880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가필드 대통령은 취임 후 6개월 뒤, 암살로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UP(유니언 퍼시픽)는 거의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결국 이 스캔들은 유야무야 묻혔고, 관련 정치인들이 사망하면서 자연스럽게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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