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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Nov 18. 2020

미국의 대륙횡단철도 1

경제사를 뒤바꾼 대륙횡단철도 이야기 1

미국 최초의 대륙횡단철도(First Transcontinental Railroad)는 1863부터 69까지 6년 동안 동부의 철도망을 서쪽으로 연결하여 건설된 2,826킬로미터(1,756마일)의 철도선을 말한다.



대륙횡단철도 노선도   <출처 : 위키피디아>


대륙횡단철도의 시작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Sacramento)에서 네브래스카 주의 오마하(Omaha)까지 연결되었다.


이 철도망으로 지역적인 한계를 극복하면서 동쪽과 서쪽의 수송망 연결이 이루어졌다. 경제적 발전과 폭발적인 금융 성장을 가져왔다.


철도 건설은 연방정부의 보조금과 철도 회사가 발행한 채권으로 자금을 조달하였다.


두 개의 대표적인 철도 회사가 탄생하면서 공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하나는 ‘센트럴 퍼시픽 철도(Central pacific Railroad, 이하 CP)’였다.


1869년 CP(센트럴 퍼시픽 철도)의 기차  <출처 : 위키피디아>


다른 하나는 ‘유니언 퍼시픽 철도(Union Pacific Railroad, 이하 UP)’였다.


참고로 하나의 회사가 더 있었는데, 웨스턴 퍼시픽 철도(Western Pacific Railroad, 1862~1870)였다. 1870년에 CP(센트럴 퍼시픽 철도)에 흡수, 합병되었다.


CP(센트럴 퍼시픽 철도)와 UP(유니언 퍼시픽 철도)


서부의 사업가 4명의 투자로 만들어져 이곳에서 공사를 시작한 회사가 CP(센트럴 퍼시픽 철도)였다. 반대로 동부에서 시작한 철도를 담당한 회사가 UP(유니언 퍼시픽 철도)였다.



UP(유니언 퍼시픽 철도)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이 두 회사가 서로 경쟁하며 건설에 나섰다.


CP(센트럴 퍼시픽 철도)는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출발, 동쪽으로 1,110km(690 마일)을 완공했다.


UP(유니언 퍼시픽)는 동쪽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1,746km(1,085 마일)을 완공했다.


1869년 5월 10일에 유타 주 프로몬트리(Promontory, Utah)에서 동쪽과 서쪽 양쪽에서 진행해 온 철도가 만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새크라멘토와 오마하 간 교통이 개통되었다.


1869년 대륙횡단철도의 만남  <출처 : 위키피디아>


로비스트(lobbyist)의 기원


흔히 로비스트(lobbyist)라는 단어는 그리 좋은 표현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의회의 로비에서 소속 단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법의 개정이나 신설이 목적이다. 의회 의원이나 정치인을 상대로 활동하는 이들을 뜻했다.


이 로비스트의 기원이 된 것이 당시의 철도회사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시행하는 철도 공사에 더 많은 연방정부 보조금과 경제적 이권을 받을 수 있도록 의원들을 설득하러 다녔기 때문이다.


백악관 근처의 윌러드 호텔(Willard Hotel)에서 상주했다. 철도회사의 이익을 위해 물불 가지지 않고 정치인들을 만나기 위해 호텔 로비에서 어슬렁거렸다. 여기서 로비스트라는 단어가 나왔다.



윌러드 호텔(Willard Hotel)   <출처 : 위키피디아>


철도 공사의 시대적 환경


결국 막대한 보조금과 이권으로 철도 공사가 완공되었을 때, 벼락부자가 속출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사업의 위험성 대비 너무도 많은 이익으로 우후죽순 철도 회사가 생겨난 원인이 되었다.


대륙을 가로질러 동서를 연결한다는 생각을 한 이들은 많았으나, 지역적 현실에 포기하고 있었다.


험준한 캘리포니아의 시에라 네바다 산맥(Sierra Nevada)과 높은 봉우리의 로키산맥(Rocky L Mountains)을 관통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  <출처 : 위키피디아>


이 때문에 당시 주요 교통수단은 마차였다.


하지만 인디언의 습격을 받는 경우가 많았기에 항상 위험을 안고 있었다.


바다를 이용한 길은 더 험난했다. 파마나 지역을 통과해야 했는데, 말라리아에 걸린 경우가 많았다.


순수하게 남아메리카의 희망봉을 돌아오는 경우가 있으나, 거센 바다 폭풍을 만나야 했다.


결국 서부의 발전이 이루어 지기 위해서는 철도 건설을 통한 교통망 연결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철도 회사의 변호 경험이 많았던 링컨 대통령(16대 미국 대통령)은 언젠가 동과 서를 잇기 위해서는 대륙횡단철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제16대 링컨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남북전쟁 와중에 시작된 공사는, 전쟁 종료 이후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었고 수많은 난관을 극복했다.


철도 공사 현장의 근로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미국인들로 공사가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서부의 CP(센트럴 퍼시픽)에는 중국인 이민자들이 있었고, 동부의 UP(유니언 퍼시픽)에는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 온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있었다.



중국인들의 미국 이민 보습   <출처 : 위키피디아>


특히 시에라 네바다 산맥(Sierra Nevada)의 건설 현장에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중국인 희생이 많았다.


당시 철도 공사 현장의 업무 강도가 너무도 높아, 백인 근로자들은 광산이나 농업으로 발길을 돌린 이들이 많았다.


인력난에 처한 회사는 궁여지책으로 중국인 이민자들(광둥 성에서 전쟁과 난을 피해 이주해 왔다)을 고용했고, 생각 이상의 효율에 만족을 했다.



중국인 노동자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이들의 희생과 봉사 위해 철도 건설이 이루어졌다.


힘들고, 어렵고, 목숨이 걸린 작업은 중국인들이 맡아야 했다.


대륙횡단철도 공사는 피와 눈물과 희생의 결정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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