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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Nov 16. 2020

남북전쟁 채권왕 제이 쿡 2

남북전쟁에 얽힌 경제 역사와 인물 9

재무부로부터 판매를 위탁받은 전쟁 채권 5억 달러는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늘어나는 전쟁 비용과 획기적인 채권 판매


전쟁터의 상황은 하루하루 치열해져 갔고 요구되는 군수 비용도 나날이 커져 갔다. 하루빨리 채권을 팔아야 그 돈으로 전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제이 쿡은 과거 텍사스공화국 채권을 판매했던 방식을 적용했다. 추가로 영업지역을 확장시켰다.


남북전쟁 당시의 제이 쿡 <출처 : 위키피디아>


가장 먼저 전국 규모의 판매 대리인(약 2,500개)을 모집했고, 이들에게 판매 홍보 자료와 안내 방법을 전달했다.


'국가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고 진정한 애국의 척도'라는 문구를 사용하여 대고객 홍보와 판매를 시작했다.


사람들이 매입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판매 금액을 소액 규모(50달러, 100달러 등)로 잘게 쪼개었다.


전문 은행가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개인을 상대로 소매 판매를 시행한 것이다.


판매 규모가 큰 대도시에서는 '주법은행'이나 여유 돈이 많은 고액 투자자에게 집중했다. 이들의 입소문도 큰 도움이 되었다.


채권 판매 홍보와 성공


금융지식이 전혀 없는 서민에게 판매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질문과 답변 방식의 대화문 홍보 책자를 만들었다.


‘채권 투자는 횡재의 지름길’이라는 자극적인 문구도 사용했다.


1861년 발행된 50달러 채권  <출처 : 위키피디아>


아울러 신문 기사를 용, 채권 구입자의 미담이나 성공기 등을 게재하는 등 언론도 활용했다.


채권 구매 동기를 효과적으로 부여했고, 판매 달성에 기여했다. 편지와 우편 주문을 통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주문으로 판매 창구는 마비될 지경이었다.


재무부 조폐창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주문량을 맞추느라 인쇄 기계가 고장날 정도였다.


말 그대로 대박이 났고 연방정부 채권 붐이 불면서 수요는 더욱더 늘어났다.


1863년 1,000달러 채권 <출처 : 위키피디아>


5억 달러 이상의 채권 판매


미국의 역사학자인 존 스틸 고든(John Steele Gordon)에 따르면, 남북전쟁 직전 미국의 권 투자 인구는 1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제이 쿡의 소액 채권 판매 성공으로 5퍼센트의 인구로 늘어났다고 했다(전쟁 말기에는 채권 매입 속도가 연방정부의 전쟁 비용 지출 속도를 능가했다)


단 하루에 5,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500만 달러를 매입하기도 했다. 결국 목표 금액인 5억 달러를 초과하여 1,100만 달러어치가 더 팔렸다.



1865년 발행된 50달러 채권  <출처 : 위키피디아>


그의 판매 전략이 효과를 본 것은, '채권 구입은 애국을 하는 동시에 경제적인 이익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공공연히 전파했던 영향이 컸다.


3가지 긍정적인 효과


채권 판매의 성공은 3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가장 먼저 연방정부의 원활한 군비 조달로 남부에 비해 월등한 보급품과 군수 장비가 공급되어 북부 군의 사기를 높이는데 일조하였다.


두 번째는 ‘그린백’을 무리하게 남발하지 않아도 되었다.

불태환 지폐의 특성상, '그린백'의 발행 축소는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채권 판매가 늘어나면서 '그린백'의 발행이 줄어들었다.


결국 화폐 남발을 억제하여 남부에 비해 북부의 물가는 상승 폭이 크지 않았다.



1865년 발행된 100달러 채권  <출처 : 위키피디아>


세 번째는 유럽 투자자들의 변화였다.

전쟁 기간 동안 은근히 미국의 분열을 즐기며 남부의 면화를 기다렸는 유럽으로서는, 북부의 채권 판매 성공이 큰 부담이 되었다.


원활하게 공급되는 북부의 전쟁 비용을 바라보면서 공공연히 남부를 지원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미국이 둘로 갈라지기를 기다렸는 이들로서는, 이제 하나의 정부를 선택해야 하는 입장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결국 남부에서 발행한 면화 채권은 유럽에서의 인기가 시큰둥하면서 판매가 저조했다. 그 결과 남부는 전쟁 비용의 부족과 자체 화폐(그레이 백)의 남발로 전쟁 기간 내내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1865년 발행된 5천 달러 채권  <출처 : 위키피디아>


연이은 채권 판매 성공


이후 제이 쿡은 1865년 초, 연방정부의 긴급한 재정 지원 요청에 따라 새로 발행된 채권 ‘7-30’ 판매에도 앞장섰다.


당시로는 상당히 금리가 높은 연 7.3%의 표면금리였기에 기존 ‘5-20’ 채권보다 판매량이 더 많았다. 약 8억 3천만 달러어치가 팔려 나갔다.


전쟁의 막바지에 이토록 많은 채권 판매가 이루어져, 북부군의 전쟁 비용 공급에는 문제가 없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채권 판매는 꾸준히 증가했는데, 이는 전후 복구비용으로 사용되었다.


1865년 철도를 이용한 박격포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금융 투자의 새로운 방법


제이 쿡의 채권 판매는 북부의 승리를 이끈 원동력도 되었지만, 산업 경제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자본 투자의 방식을 전파했다는 점이 더 상징적이었다.


미국 서민들의 침대 밑에 잠들어 있던 현금을 끄집어내어 ‘투자’라는 개념으로 바꾸는데 일조한 것이다.


'저축'에서 '투자'로 자본 성격이 변화되었다.


아울러 채권 판매 방식은 기존 공급자 중심의 시장 체계를 바꾸어 놓았다.


남북전쟁 전에는 채권 수요자를 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5% 내외의 수수료를 받았지만, 제이 쿡의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더 많은 채권을 팔아도 1.3%의 수수료만 받았다. 그래도 많은 이익이 생겼다.



말년의 제이 쿡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판매 금액은 초기 전쟁 채권 판매 예상액의 약 20배였다고 한다. 혁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남북전쟁 이후 제이 쿡의 삶


전쟁 종료 후 제이 쿡은 1870년부터 북태평양 철도 건설에 자금을 투자했다.


하지만 1873년 공황으로 파산을 하게 되지만, 재기에 성공하여 남은 여생은 부유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었다.


그는 1905년 2월 83세의 나이로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했다.


제이 쿡의 묘소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독실한 성공회인이었고 십일조에 대한 믿음을 지켜나갔다고 한다.


필라델피아 신학교와 펜실베이니아 주 엘킨스 파크에 있는 세인트 폴의 성공회를 포함하여 성공회 교회를 짓기 위한 기금에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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