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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Nov 14. 2020

남북전쟁 채권왕 제이 쿡 1

남북전쟁에 얽힌 경제 역사와 인물 8


미국의 채권왕 제이 쿡(Jay Cooke, 1821~1905)은 1821년 미국 오하이오주 샌더스키(Sandusky)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집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당시 북군의 승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의 활약으로 전쟁 채권 판매가 대성공했기 때문이다.


전쟁 후에는 북태평양 철도 개발에도 투자한 이력이 있다. 사실상 미국 최초의 투자 은행가였다.



아버지 엘루테루스 쿡  <출처 : 위키피디아>


제이 쿡의 탄생과 어린 시절


그는 오하이오주 하원 의원을 역임한 변호사 엘루테루스 쿡(Eleutheros Cooke, 1787~1864)과 마사 카스웰(Martha Carswell Cooke)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0대 시절에 '제2 미국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었다.


빠르고 정확한 일처리, 핵심만 간추려 보고하는 능력은 탁월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흰 피부와 큰 키, 푸른 눈과 금발머리는 누구에게라도 좋은 첫인상을 심어주었다.



1839년 제이 쿡의 모습



금융인의 시작과 텍사스 공화국 채권 판매


본격적으로 금융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838년 E.W. 클라크(E.W.Clark&ComPany)의 소규모 금융기관에 입사하여 파트너로 본격적인 업무(1842년)를 시작하면서부터 이다.


이 회사는 미국에 편입되기 이전의 텍사스 공화국 채권을 판매 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 편입 후 채권의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영업을 진행했고 실적도 좋았다.


아마도 이 시기부터 채권 투자에 대한 식견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텍사스공화국  <출처 : 위키피디아>


캘리포니아 금광이 발견되고, 서부의 골드러시가 진행되면서 금융 버블이 발생했다. 회사는 규모를 더 키워 나갔다.


하지만 ‘1857년 불황(Panic of 1857)’이 시작되면서 결국 파산했다. 참고로 이 불황은 남북전쟁 발발 전까지 이어졌다.


제이쿡앤컴퍼니(Jay Cooke & Company) 설립


제이 쿡은 회사를 나와 1861년 필라델피아에 ‘제이쿡앤컴퍼니(Jay Cooke & Company)’라는 개인 은행차렸다.


남북전쟁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시기 남북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펜실베이니아 주정부는 전쟁 공채(war bond) 300만 달러(이자 연 6%)를 발행했다. 판매에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이 쿡이 나섰다. 채권 일괄 판매 방식이 아닌, 쪼개기 방식을 적용시켰다.


기존의 돈이 많은 금융가은행에게 일괄 판매하는 방식이 아닌, 일반 서민을 대상으로 판매한 것이다.


50달러,100달러,500달러,1,000달러 등 다양한 금액으로 발행을 했고 애국심에 호소하는 언론 방식을 적용했다.


당연히 ‘법률에 의한 원금보장’이라는 문구도 붙어 있었다. 채권은 순식간에 모두 판매되었다.



체이스 재무부 장관  <출처 : 위키피디아>


체이스의 만남과 북부 전쟁 채권의 판매


이후 쿡은 당시 재무부 장관인 체이스(Salmon P. Chase, 1808~1873)를 만나 북부에서의 채권 판매를 도와주었다.


그의 능력과 애국심을 알아본 체이스는 의회가 승인한 5억 달러의 전시 채권 판매를 그에게 위탁했다. 이 채권은 재무부에서 직접 판매를 시도했으나 실패한 전력이 있었다.


당시 연방정부의 재정상태는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1857년 불황(Panic of 1857)'의 여파로 관세 수입은 크게 줄어들었다.


남부의 면화를 매입하여 가공 후 수출하는 방식이 중단됨에 따라 금화와 은화 수입이 줄어들었다. 심지어 의회 의원들에게 줄 급여 조차 부족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1857년 불황 묘사 삽화  <출처 : 위키피디아>


불태환 지폐 '그린백'의 발행과 위헌 소지


결국 체이스 장관은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2가지 방식을 시행했다.


하나는 소득세 세금의 신설과 징수였고, 다른 하나는 불태환 지폐인 ‘그린백(Greenbacks)’ 발행이었다.


소득세 신설은 미국 탄생 후 처음 적용한 세금 제도였고 사람들의 불만을 고려해 조심스레 진행했다. 영구적인 세금이  아닌, 전시 기간에 적용된 한시적 조세제도로 시행했다.


전쟁이 터지자 급격하게 발생된 전쟁 비용으로 연방전부가 보유한 금의 보유고가 바닥을 보였다. 결국 1861년 12월 금태환이 중단되었다.


연방정부는 금과의 교환이 안 되는 불태환 지폐를 발행하기로 했고, 결과로 나온 것이 '그린백'이었다.


금과 태환 되지 않는 '그린백'의 발행은 시작부터 위헌 논쟁을 불러왔다.


연방정부가 화폐(종이돈)를 발행하고 강제 유통시키것은 법률에 어긋난다는 취지였다.



1달러 그린백 지폐  <출처 : 위키피디아>


의회의 권한은 화폐의 ‘인쇄(print)’가 아닌 금과 은의 ‘주조(coin)’에 있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있는 현실에, 돈이나 재산 가치의 감소를 사람보다 먼저 걱정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논리에 묻혔다.


결국 '그린백'은 전쟁 종료 후 위헌 논쟁에 휩싸였고, 이를 최종 판결하는 대법원장은 우연하게도 재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체이스가 맡게 되었다.



5-20 채권 판매  <출처 : 위키피디아>


전쟁 채권 판매의 시작


제이 쿡은 새로 맡게 된 5억 달러의 전쟁 채권을 판매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도입했다.


먼저 채권의 이름을 알기 쉽게 ‘5-20’으로 붙였다.


이는 채권의 표면금리 6%에 만기가 20년이지만, 연방정부의 재정이 좋아질 경우 5년부터 조기 상환이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사실상 지금의 프라이머리 딜러(primary dealer, 해당 국가의 정부나 중앙은행과 계약을 맺고 국채 발행시장에 참가하여 국채를 인수하는 금융기관을 뜻함)였다.


그는 판매 금액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잘되면 초대박 사업 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고,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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